홍보효과만을 노린 오페라단측의 연출에 대한 무리한 간섭이 오페라 공연을 파행으로 치닫게 했다.
한강오페라단(단장 박현준)이 9일부터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 중인 오페라 ‘라보엠’ 연출을 맡은 연극인 유인촌씨는 11일 “오페라단 측이 연출자의 품격을 해치는 요구를 계속해 이 상태에서는 공연을 계속 할 수 없다”며 연출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남은 12, 13일 공연은 연출자가 없는 상태에서 치러지게 됐다.
갈등의 핵심이 된 사건은 4막에 등장하기로 한 ‘누드모델’. 당초 이 오페라 4막에는 화가 마르첼로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 전라의 모델이 등장할 예정이었다. 연출자의 동의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오페라단측은 이를 홍보했지만 연출을 맡은 유씨는 누드모델 등장에 반대해 9, 10일 공연은 당초 알려진 바와 달리 누드모델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됐다.
한 출연자는 “오페라단측이 ‘이미 널리 홍보됐다’는 점을 들어 전라모델 신을 강행하려 했지만 유씨가 이에 완강한 반대의사를 표현했다. 연출자는 정통 연극적 연출을 고수하려 했지만 박현준 단장이 ‘대중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며 압력을 계속해 갈등이 그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 해설자로 출연한다고 소개됐던 탤런트 오미희씨도 ‘개인사정’을 이유로 등장하지 않아 막간 휴식시간에 청중들이 주최측에 항의하는 등 소동을 빚기도 했다.
한편 이번 사건은 최근 자주 지적돼온 ‘오페라 공연 부실화’의 경향이 표면으로 드러난 사례라는 점에서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오페라 평론가 박종호씨는 “올 가을 15편의 오페라가 서울 무대에 올려지지만 지금까지 본 오페라는 대개 한심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막간에 각종 이벤트가 정신을 어지럽게 하고, 오자투성이 자막에다 아르바이트생들로 급조된 오케스트라가 조야한 소리를 내고, 체조에 가까운 수준낮은 무용단이 ‘발레’장면을 연출하는 등 올 가을 오페라 무대는 청중을 늘리기보다는 훗날의 청중을 빼앗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오페라 관객은 “최근 공연된 ‘라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보았는데 무대 연출 합창 오케스트라 출연진까지 하나도 만족스러운 것이 없었다. 이런 정도라면 국내 오페라 관람은 앞으로 포기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공연작품 지원사업이 보다 실질적인 심사를 통해 진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오페라 ‘라보엠’은 서울시로부터 2001년 무대공연작품지원 명목으로 1억원을 지원받았다.
한 공연관계자는 “각계 전문가로 공연심사단을 편성해 공연지원 단계부터 약속된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지원금을 회수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