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를 180년간이나 식민통치했던 영국은 싱가포르에게 살길을 열어주지 않은 채 철수했고, 말레이시아는 연방 중 하나로 살아남기를 열망하는 싱가포르를 냉혹하게 추방했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억지 독립을 했지만 내우외환이 겹쳐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젊은 지도자 리콴유(李光耀)는 ‘생존의 길은 일류국가를 만들어내는 방도 이외는 없다’는 신념으로, 부패를 몰아내고 질서를 확립한 터전위에 막강한 지도력으로 국민적 총 역량을 발휘케 하여 20여년 만에 일류국가의 꿈을 실현했다.
리콴유의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문학사상사·2001년)은 그 시련을 넘어 영광에 이르는 역정(歷程)을 상세하게 기록한 역저로 평가되고 있다. 흔히 ‘일류국가 만들기’를 위한 세계 유일의 교과서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이 책은 부드럽고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방대한 분량의 기록인데도, 소설처럼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 도서 상세정보 보기 & 구매하기
저자는 자신과 만나 상호 관심사를 논의했던 역대 한국의 대통령과의 비화도 공개하고 있어 자못 관심을 갖게 한다. 특히 어떤 경우든 끝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는 극한투쟁의 관습화 경향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토착화되지 못했다는 저자의 지적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충고라고 생각된다. 리콴유가 40년간이나 국정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독점하고 있지만, 국민적 비판이나 저항없이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은 인격과 예지와 능력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답을 이 책 속에서 얻을 수 있었다.
또 리콴유가 30년 이상 국제 정치 무대에서 굵직굵직한 이슈 해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예를 들면 리콴유는 미국과 중국간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때 닉슨의 자문역을 하며 깊이 관여했고,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 전환 때는 덩샤오핑(鄧少平)의 개인교수 노릇을 했다. 또한 미국과 이라크간의 걸프전쟁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아랍세계에 대한 포괄적 정책수립에 관한 자문을 하기도 했다. 1980년 새해 벽두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당시에는 본으로 날아가 영국과 독일의 총리와 전 현직 미국 국무장관을 한 자리에 회동케 해 소련을 아프카니스탄에서 격퇴시켜야하며 그를 위한 아프카니스탄 군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결의를 가다듬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의 활동으로 미루어 어쩌면 지금쯤 뉴욕 테러사태로 빚어진 난제를 풀어나가는데 있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처럼 몰래 리콴유를 불러 훈수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박춘호(부경대 석좌교수·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