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 로라 부시 여사가 찾아간 도시는 뜻밖에도 시카고였다. 그곳에서 제작되는 한 TV 토크쇼에 직접 출연해 전국의 부모와 교사들에게 테러 공격에 의한 정서적 충격을 어린이들이 잘 극복할 수 있도록 각별히 노력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적 메시지로 인기 싹쓸이▼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사회자의 이름을 딴 ‘오프라 윈프리쇼’. TV 토크쇼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구가하고 있는 이 프로는 미국에서 하루 1400여만명의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주한미군 채널을 포함해 전 세계 132개국에서 방영되고 있다.
‘에미(Emmy)’나 ‘피바디(Peabody)’ 등 권위 있는 방송 대상을 거의 매년 석권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쇼가 지난 달로 16돌을 맞았으니 우리에게도 오프라라는 이름은 별로 낯설지 않을 때가 됐다. 물론 우리는 그녀를 ‘컬러 퍼플(ColorPurple)’과 ‘비러비드(Beloved)’에 출연한 영화배우로 기억할 수도 있다. 게다가 지난 몇 년 동안 국내 매스컴에도 그녀에 대한 기사가 곧잘 등장했다. 대부분은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가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장벽을 넘어섰다는 성공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프라가 그저 성공한 방송인이나 연예인 정도라면 우리가 각별히 주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그 이상이다. 현재 그녀는 출판 영화 음반 미디어산업에 활발히 진출하는 한편 각종 교육 복지 및 자선사업을 맹렬히 추진하고 있다. 지난 해 4월 창간된 ‘오(O), 오프라 매거진’은 최근 몇 십 년 동안 미국에서 시도된 새로운 잡지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또한 1993년 태동한 ‘전국아동보호법’은 그녀의 노력을 반영하여 ‘오프라 빌(Oprah Bill)’로 통칭될 정도다. 1998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유력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은 데 이어 금년 초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그녀를 ‘세기의 여성’으로 부른 데에는 다 그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미국 사회의 오프라 열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흔히 거론되는 것은 그녀의 탁월한 화술, 솔직한 자기고백, 그리고 친구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오프라 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라면 오프라 열풍의 실체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남녀 흑백 노소를 불문하고 미국인들이 오프라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그녀의 메시지 속에 미국적 이데올로기가 깊이 용해돼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것을 ‘오프라이즘(Oprahism)’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언필칭 ‘기회 균등의 나라’ 미국에서 ‘성공’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 비해 특히 중요하다. 그런데 기회가 균등한 만큼 성공과 실패의 책임은 남이 아닌 본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인생의 성공 여부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가늠된다고 보는 오프라의 생각도 이 점에서 매우 미국적이다. 하지만 기회 균등의 신화가 미국에서 날로 퇴색하고 있다면 성공의 개념 자체가 달라질 필요가 있다. 바로 이 문제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것이 오프라이즘이다. 왜냐하면 성공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자기긍정과 부단한 자기계발 및 자기만족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프라에게 있어서 삶이란 계급이나 성별, 인종 등 사회구조적인 차원이 아니라 건강과 독서 가족, 그리고 영성(靈性)처럼 사적이고도 일상적인 영역에서 보다 중요하다. 말하자면 노동자나 여성 혹은 흑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개별 인생의 승패에 직결된 것은 아니다. 그 결과 기회균등의 원칙은 형식상 지속될 수 있으며 대다수 미국인은 체제의 정당성을 믿는 가운데 자신의 성공을 꿈꾸기도 하고 실패를 달래기도 한다.
▼사회문제를 개인화했을 수도▼
혹자는 사회문제를 개인화하고 역사의식을 파편화한다는 점에서 오프라이즘을 미국식 보수 이데올로기의 전형으로 비판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프라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미국의 보통사람들을 딱하게 여기거나 욕할 수는 없다. 개인에 대한 배려나 개성에 대한 존중 자체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한림대 교수·사회학·현 미국 워싱턴대 교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