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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테러 문화갈등 치유]하스미총장-박이문교수 대담

입력 | 2001-10-16 18:58:00


문화비평가이자 불문학자인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65) 전 일본 도쿄대 총장과 박이문(朴異汶·71·철학) 미국 시먼스대 명예교수가 12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만나 이번 미국 테러사건으로 표면화된 서구와 이슬람권 사이의 문화적 갈등, 대학 발전방안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하스미 전 총장은 발전계획을 수립중인 서울대의 자문 요청에 따라 내한했다가 13일 출국했다.

▽박이문〓어느 한 지역의 고유한 문화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보존하려고 하고, 그로 인해 다른 문화와 갈등을 빚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그 갈등의 폭이나 빈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겠지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갈등이 상징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스미 시게히코〓얼마 전 프랑스의 사상가인 자크 데리다는 이번 미국 테러사건에 대해 “세계화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언급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 미국 테러사건을 저지른 테러리스트들은 지금 미국의 공격을 받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국민이 아닙니다.

범인들은 이슬람권 전체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지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테러리스트들이 국가의 범주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어떤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함께 앞으로 테러리즘도 필연적으로 세계화될 것이라고 봅니다.

▽박〓세계화가 폭넓게 진행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에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특정한 집단이나 국가가 정치 경제적으로 독점적 지배를 행사하려 하기 때문이지요. 나아가 이들은 각 나라가 지닌 문화의 특수성도 부정하려 합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미국이 다른 나라, 특히 이슬람권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스미〓우리는 지금 국가의 개념이 소멸되고 있는 역사적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이 공격을 받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인의 행동은 대단히 내셔널리즘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장 세계화된 듯한 미국인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서 반응하는 방식은 매우 내셔널리즘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가 한편으로는 전지구화됐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더욱 내셔널리즘적이고 지역주의적이 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박〓진정한 세계화는 전 세계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각 나라가 문화적 갈등을 극복하고 세계가 전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문화 사이에 문화적 보편성을 찾아내 공존을 모색해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 정의, 공정성 등은 세계가 공유해야 할 가치입니다.

또 국가간 문명간 대화와 함께 상호 존중을 통해 문화의 보편성을 찾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스미〓20세기 초만 해도 아랍인과 유대인, 터키인은 공존했고 이것이 실제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구적 근대화 과정에서 이들이 각각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저항이 있었고 불행하게도 유대인과 이슬람인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는 미국인들에 의해 이슬람인들은 나쁜 사람이고 유대인들은 좋은 사람이라는 ‘가상적 현실’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지게 됐지요.

이처럼 현재의 서구와 이슬람권의 갈등은 상당부분이 이런 ‘가상 현실’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때때로 이런 가상 현실을 ‘실제 현실’로 간주한다는 것이지요.

▽박〓고립되고 궁지에 몰린 이슬람인이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현 상황입니다. 세계화가 진행되더라도 지역마다 문화의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류는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지혜를 모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스미〓테러 사건을 둘러싼 갈등을 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인간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현 시점에서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가장 중요하며, 문화 전통이나 정체성에 대한 존중은 그 다음 문제라고 봅니다.

상황이 어렵지만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슬람권 역시 인류의 이런 보편적 가치를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입니다. 세계는 문화적 갈등 등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보편적 가치를 지키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를 예로 들면 일본인으로 살면서도 한편으로 국적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문화는 사람들을 국가적 또는 민족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박〓‘삶의 방식’으로서 넓은 의미의 문화 이외에, 지적이고 예술적 교육적 미학적이며 도덕적 이상(理想)으로서의 문화도 같이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봅니다. 오늘날 문화의 가치는 시장이나 상품의 가치와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문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생산물의 저속화와 고급 문화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학의 역할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스미〓우리는 대중문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대중문화는 매우 생동감이 있고 반응도 즉각적입니다. 이에 비해 고급문화가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이 고급문화만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대학이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이 대학의 후퇴나 좌절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아울러 오늘날 대학에 꼭 필요한 것이 기초학문입니다. 대체적으로 대학에서 기초학문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첨단과학으로 각광받고 있는 생명공학이나 인공지능 등은 오랫동안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종류의 기초학문 연구가 필요할지 현 시점에서는 정확히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먼 미래를 대비하지 못합니다.

대학에서는 실용성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대학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유용하지만 수단일 뿐이지 영어가 최종 목표는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khc@donga.com

◆하스마 총장 약력

일본의 저명한 문화비평가이자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1997년부터 4월까지 도쿄대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도쿄대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도쿄대의 개혁을 주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서구 학자들을 역공격하는 한편,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박이문교수 약력

1964년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불문학박사, 1970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시몬스대 교수를 거쳐 1991년부터 지난해까지 포항공대 교수로 활동했다. 철학 문학 등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화 전반을 넘나드는 폭넓은 저서들을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는 ‘자연 인간 언어’ ‘이성 합리성 가치’ ‘예술철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