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종길(崔鍾吉) 서울대 법대 교수가 73년 사망 당시 중앙정보부 발표처럼 ‘유럽거점 간첩단사건’ 등 북한의 공작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휘말려 이에 저항하다 숨진 것이라는 물증과 증언 등이 속속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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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보 증언입수 “최종길교수 중정 공작 희생양”
최 교수 사건의 맥락을 잘 아는 한 인사는 “그의 죽음은 유신정권 하에서는 양심적인 자유주의자조차 설 땅이 없었고 선량한 시민도 얼마든지 공작정치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공작의 표적이 되다’〓최 교수가 중정의 표적이 된 경위는 그의 동생 종선씨가 중정 동료로부터 들었다는 ‘최 교수에 대한 공작여건이 성숙했다’는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교수회의서 시위진압 항의▼
최 교수가 출두하기 2주일 전인 73년 10월2일 서울대 법대의 시위를 도화선으로 해 유신정권 출범 1년만에 유신 반대 시위가 대학가로 번져나가 정권측을 당황케 했다.
이 무렵 중정은 서울대 법대생과 교수 등 지식인들 가운데 반(反)유신세력들을 상대로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이뤘고 실제 몇 갈래 공작을 진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 교수의 지인들은 “그는 법학자로서 유신헌법과 유신정권에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며 특히 시위 진압과정에서 학생들이 경찰에 구타당하고 연행되자 교수회의에서 ‘총장이 대통령에게 항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크게 반발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최 교수는 정권의 타깃이 됐고 ‘동베를린사건’과 ‘유럽거점 간첩단사건’ 주모자 가운데 인천중(현 제물포고) 동창이 다수 포함된 점도 공작 대상으로 삼는 좋은 구실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최교수가 황모씨와 함께 동베를린의 지하철역까지 갔었고, 동백림사건 등의 관계자들 가운데 인천중 동창들이 여럿 있었던 점 등도 그를 압박하기에 좋은 구실이었다.
▽중정의 공작과 최 교수의 저항〓공작은 최 교수가 간첩 혐의 추궁에 크게 반발해 첫날부터 완강한 저항에 부닥쳤다고 당시 중정 관계자는 증언했다. 이 관계자는 “최 교수의 저항으로 조사방향이 상당히 우왕좌왕했다”며 “그 과정에서 돌발상황이 일어나 최 교수가 죽음에 이른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최 교수를 조사한 공작과의 상황도 문제였다. 이 사건에 정통한 중정 관계자는 “72년 유신정권 출범 무렵 중정 5국(대공수사국)에 창설된 이 부서는 김대중 납치사건(73년 8월) 이후 지식인 상대 공작을 5, 6건 벌였지만 모두 실패해 존재가치에 심각한 회의가 일었다”고 전했다. 따라서 공작과 수사관들은 심적 부담이 극심했던 마당에 최 교수에 대한 공작마저 뜻대로 되지 않자 심한 가혹행위를 했을 것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당시 공작 내용에 대해 다른 관계자는 “유신체제에 적극 찬성토록 회유하는 것으로부터 서울대 내부 동향보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은폐 지휘라인 윤곽”▼
▽누가 사건을 은폐·조작했나〓최 교수를 공작대상으로 선정하고 그가 숨진 뒤 간첩사건을 조작·은폐한 책임자가 누구인지가 최종 관심사.
최 교수의 학내 발언과 행동거지는 중정의 서울대 담당 조정관 김모씨와 유신정권에 협조적이던 교수 등을 통해서, ‘최 교수가 유럽거점 간첩단사건의 주범 이모씨(인천중 동창)의 부친상에 갔었다’는 정보는 동창들을 통해 취합하는 등 서로 관계없는 다양한 경로로 정보가 수집됐다.
이를 취합해 최 교수를 공작대상으로 지목하고 그가 숨진 뒤 당시 별개로 진행되던 간첩단 사건(수사과 소관)과 최 교수 사건(공작과 소관)을 하나로 엮어내려면 중정 내부에서도 상당한 고위직이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관계자들의 증언이 나왔다.
이와 관련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 교수 사건을 은폐·조작한 중정 지휘라인에 대해 많은 정보를 확보했다”며 책임소재의 규명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rati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