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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한수산/가을 들녘서 희망을 보았네

입력 | 2001-10-21 18:36:00


나이 들어 시력이 떨어지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돋보기를 쓰게 되었을 때였다. 신문을 펼쳐들어도 본문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아 이것도 자연의 섭리로구나 했다. 세상을 그만큼 살았으면 이제 제목만 보아도 그 안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나이가 된 것 아니냐. 무얼 그렇게 작은 글자까지 보려 하느냐. 그런 타이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쏟아내고 있는 괴이한 설만이 횡행하는 하루하루, 절망으로 짓이겨지는 나 자신이 싫어 지난주는 내내 신문의 제목만 보며 지냈다. 제목만으로도 사건의 진상과 그 진행 추이까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가 하는 씁쓸한 자조(自嘲)에 젖으면서.

▼메뚜기 뛰고 반딧불이 날고▼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양평에서 남한강을 만났다. 남한강이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었다. 수도권의 허파로서 양평의 가을도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잘 단장된 6번 국도가 가로지르고 있는 거기, 가을이 무르익는 들판에 허수아비가 무리 지어 서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길 옆에 차를 세우고 허수아비와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아, 또 하나 양평의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

양평군이 범국민적인 노력으로 농약 안 치는 영농을 시작한 지 몇 해가 된다. 그렇게 해서 메뚜기들이 살아나고 있다. 곳곳에 오리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논도 눈에 띈다. 반딧불이와 메뚜기가 뛰는 농촌을 만들자는 친환경농업을 향한 노력이다.

형설의 공이라는 한자 숙어를 배우던 때, 반딧불이를 잡아 병에 넣고 그것으로 정말 글자가 보이는 것일까 실험을 해 보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 반딧불이가 살아나고, 논에서 메뚜기가 뛰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도권의 상수원을 지키는 양평의 자존심이 하나씩 가시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혜원여고의 독서행사장엘 다녀왔다. 학교붕괴니 공교육의 위기니 하는 말을 하지만, 누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가 싶게 학교는 아름다웠다. 교사들의 열린 가슴에 애정이 흐르고, 학생들은 자존심 가득한 빛나는 눈빛으로 복도를 오갔다.

학생들이 입던 옷가지들을 가지고 나와 알뜰 바자를 열고 있는 교정은 밝고 화사했으며 건강한 웃음으로 가득했다. 한 반이 그룹이 되어 독후감을 쓰고 그것을 다시 무대 위에 올려 극화해서 보여준다는 놀라운 발상의 독후감 경연대회가 이어질 때 나는 무엇인가가 가슴에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가 공교육의 절망 말하는가▼

무대에 오른 독후감 속에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초월적 신념을 질책하는 독자와 논쟁을 벌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힘찬 희망의 싹이었다. 누가 공교육의 절망을 이야기하는가. 열정에 넘친 선생님들 사이에 서서 나는 극화된 독후감이 아닌 희망을 보고 있었다.

지난 봄 나는 작업실 입구에 그 등황색 꽃빛의 담담함이 좋아 원추리를 심었었다. 봄에 심은 원추리는 오랜 가뭄에도 잘 뿌리를 내리더니 여름에는 노랗게 꽃을 피워냈다. 너무 큰 꽃잎이 싫어서 마당에는 산목련을 심었는데, 그 작고 애잔하던 꽃 모양에 나는 이른봄을 황홀해 했었다.

그 나무들도 이제 늦가을을 준비하고 있다. 키워내고 거두고 마감하는 질서가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풀과 나무들을 바라보자면 탄식처럼 가슴 속을 가로질러 가는 말이 있다. 나는 올해 키워낸 것이 없으니 거두어들일 것이 없구나…. 그래서 이 가을이 또 부끄럽다.

강물은 아름답게 깊어 가는데 왜 우리들에게는 시름만 깊어 가는가. 그러나 가을 들판 저기에 찬이슬에 젖어 막막하게 아침햇살을 맞고 있는 구절초가 보인다. 숨은 듯 버려진 듯 자라는 꽃이다. 잘난 모든 것들이 시들어 가는 때에 그렇게 늦게 꽃을 피워낸다. 이 또한 얼마나 위대한가.

우리 사회는 왜 시간이 흘러도 거두는 것에 이토록 가난한가 자성해 보지만,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는 바로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희망을 말하고, 희망을 거두어들일 지혜에 가슴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저 가을의 가르침을 새기며.

한수산(작가·세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