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천년의 고도’ 경주를 찾는 사람이라면 왕릉들 사이로 스쳐 가는 가을 바람에 덧없는 역사를 서러워만 하지말고 역사와 자연의 순환과 상생(相生)의 원리를 담은 현대미술품도 관람해 볼 일이다.
고대의 문화 유산 속에서 특이하게 현대 미술을 꽃 피우고 있는 아트선재미술관(경주시 신평동)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12월25일까지 갖고 있는 ‘윤형근 심문섭’ 전은 한국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들을 통해 자연과 역사의 질서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고고한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전시회여서 관심을 모은다.
아트선재미술관이 한국현대미술의 전개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그 발전 가능성을 찾아보는 기획전으로 마련한 이 전시회에 초대된 윤형근(73) 심문섭 씨(59)는 모두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화가와 설치미술가다.
윤 씨는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시작된 앙포르멜(비정형 미술)이나 모노크롬(단색화) 파의 선두주자로 오늘날까지 흔들림 없이 자신의 화풍을 견지해오고 있으며, 심 씨는 70.80년대에 현대미술의 형식을 치열하게 실험해 온 중추적 작가로 나무 돌 쇠 등 자연적 소재들로 동양적 순환사상을 형상화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심 씨는 아트선재미술관 공간에 맞는 설치작품들을 새로 제작했다.
입구 전시실에는 통나무를 길이대로 반으로 자르고 안을 파낸 후 이를 여러 개 계단식으로 이어 붙여 물길을 만들고 물을 흘려보내는 작품이 선보인다. 물은 나무 길로 흘러 저수 통에 모였다가 모터로 원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다시 흐름을 반복한다. 물의 양은 적으나 공명 통이 이용돼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심 씨는 “어린 시절 나무로 물길을 만들어 논에 물을 대던 추억을 되살린 작품”이라면서 “자연 속에서 순환되는 물의 영원성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다른 전시실들에서 심 씨는 나무를 듬성듬성 깎아낸 표면 위에 종이로 접은 배를 놓아 두어 마치 파도 일렁이는 바다 위에 배가 떠 있는 듯한 장면이나, 돌 속에 전구를 집어넣어 돌이 광선을 뿜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또 논바닥의 흙을 철제 통에 담아 생성과 소멸을 함께 껴안는 흙이란 물질의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한편 윤 씨의 작품전은 70년대이래 최근까지 그의 작품들을 정리하는 회고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누런 마포 위에 먹빛이 나는 유채로 크고 작은 사각형들을 칠해 모노크롬적 화면을 만들어왔다. 초창기에는 물감이 번져나가는 형태가 살아 있으나 갈수록 이런 형태가 사라진다. 최근작에는 화면분할이 중시되는 기하학적 추상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미술평론가 지바 시게오는 “서구의 모노크롬과 달리 그의 작품에서는 조선시대의 고고한 선비 정신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054-745-7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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