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의 제자인 아난다가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석가모니가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입니다”라고 고쳐주었습니다. 배창환이라는 시인은 이 대목에서 목이 메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정치학은 고약한 학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에 대해 믿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불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대로, ‘신도 아니고 야수(野獸)도 아닌 중간자적 존재’로 인간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도 아니고 야수도 아니기에 정치를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치학은 이런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위대한 중간자' 차고 넘쳐▼
그래서 그런지 저는 인간에 대해 그다지 신뢰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물론 깡그리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적당히 믿고 적정한 수준에서 의심을 하자, 이런 어중간한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옳은 일이라 싶어 앞뒤 재지 않고 밀고 나가려 할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뜻을 같이 할 줄은 정녕 몰랐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인간을 바라보는 제 눈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조금만 눈을 크게 떠보면 세상에는 ‘위대한 중간자’가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는 동아일보에 실린 ‘내리사랑 양친회’에 관한 글을 읽고 며칠 동안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6·25전쟁 때 우리 살림살이가 얼마나 고달팠습니까. 외국에서 건너온 구호 물품에 ‘꿀꿀이죽’ 신세를 얼마나 졌습니까. 그때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은 이들이 모여 우리보다 가난한 외국의 어린이들을 돕는다고 했습니다.
또 있습니다. 어느 할머니는 해거름이면 어김없이 시장에 가서 팔다 남은 푸성귀를 사다 모읍니다. 그것을 이웃의 힘든 사람들과 나누어 먹기를 십수년간 해 왔다고 합니다. 입사 시험에 떨어진 지원자들에게 서류를 되돌려준다는 어느 기업체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주변에도 자랑할 만한 사람이 여럿 있군요. 지방에서 작은 병원을 경영하는 의사 친구는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와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으나, 이 정도로나마 살 수 있다는 것이 왠지 죄스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의논을 한 겁니다. 치과 기공사를 하는 어떤 친구는 주말이면 시골로 내려가 돈과 시간을 들여 봉사를 합니다.
한 친구는 또 다른 이야기로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 이미 다 큰 아들을 둘이나 두고 있는 처지에 셋째를 가졌다기에,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전후사정을 직고(直告)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뜻밖에도 입양을 했다고 했습니다. 평소 ‘내 잔이 넘치나이다’며 황송해 했답니다.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할 길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답니다.
깊어 가는 가을밤, 우리는 그 친구와 새 생명을 위해 소리 높여 건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받는 말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사랑을 주자고 한 일인데, 오히려 자기가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베풀면 진정한 만족 얻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말을 하고 있지요. 미국에서 대학 교수를 지낸 주인공은 어느 순간 근육위축병에 걸립니다. 위로를 하려 모여든 사람들에게 모리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강의’를 합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이 진정한 만족을 준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들에게 베풀 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너무 많아 압도당할 정도이다’라고 말입니다.
세상일에 실망을 많이 하시지요. 인간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인가 한탄할 때가 많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밤길에 사람 만나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고 하지요. 그러나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역시 인간입니다. 천국이 따로 있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