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희곡을 쓰고 있고 앞으로도 쓸 얘기가 너무 많습니다. 며칠전 이사하려고 짐을 정리하다 누렇게 뜬 원고 뭉치를 발견했어요. 쓰다 만 희곡이 7편이나 있었어요.”
1951년 희곡 ‘별은 밤마다’로 등단한 원로 극작가 차범석(77)씨가 등단 50주년을 맞는다. 10년, 20년도 아닌 반세기를 희곡에 매달렸지만 그가 지닌 ‘창작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그가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을 무대에 올린다.
최승희의 무용에 반해 무대 예술과 인연을 맺은 그는 연극 ‘산불’ ‘불모지’ ‘바람분다 문 열어라’ 등을 통해 우리 연극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연출자로 활동해왔고, 스승인 이해랑 유치진의 뒤를 잇는 리얼리즘 연극의 파수꾼으로 불린다.
평생 연극만 바라보고 살아온 그의 ‘외길’은 쓸쓸하지 않다. 이번 무대에서는 연출을 맡은 임영웅(67)과 주인공 손숙(57) 등 연극계를 대표하는 후배들이 길 동무가 됐다. 세 사람이 한 작품에서 만나는 것은 1971년 ‘산불’ 이후 무려 30년만이다.
이번 작품은 2년 전 쓴 희곡으로 이 공연을 위해 소극장 무대에 맞게 재창작됐다.
이 작품은 남편 둘을 사별하고 아버지가 다른 남매를 홀로 키우다 죽음을 선택한 한 여인의 삶을 담은 작품이다.
보험 생활 설계사인 정숙(손숙)은 첫째 남편의 아들로 전실 자식인 종규(이찬영)와 두번째 남편에게서 얻은 딸 윤미(전현아)와 함께 살아간다. 정숙은 성장할수록 첫 남편을 닮아가는 종규에게서 키운 정 이상의 강한 집착을 보인다. 종규는 엄마를 피해 자원 입대를 하고 정숙은 혼란과 상실감에 몸부림친다.
차범석은 “가을 비에 젖는 낙엽이 떨어지는 거리를 생각하면서 희곡을 썼다”며 “관객들이 이 작품을 통해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슴 속으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숙은 “내 자신이 딸 만 셋을 키운 탓에 아들 키운 경험이 없다”면서 “아들을 키우는 후배들에게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 귀동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숙을 통해 중년 여성의 억압된 삶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싶다”고 밝혔다.
이 작품의 연습장인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은 원로에서 20대 배우까지 함께 어울려 연극계의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자리가 되고 있다. 20일 연습장에서는 연극배우 전무송의 딸로 이 연극에 출연하는 전현아가 화제에 올랐다.
“현아 아버지와 함께 작품을 했는데 이제 딸하고 무대에서 만납니다.”(임영웅)
“정말 세월 빠르죠.”(손숙)
“세월이 ‘웬수’ 같아.”(차범석)
차범석은 “요즘 극작가들은 원고료 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창작 여건이 어렵다”면서 “하지만 50년 전으로 돌아가도 원고지를 집어든 내 선택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 선배들이 많아 작업하기 힘들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번 연극에서 여의사 역을 맡은 예수정의 대답이 걸작이다.
“너무 좋아요. 역사 속에 있는 것 같아서.”
공연은 30일부터 11월25일까지 화수목일 오후 3시, 금 오후7시, 토 오후 3시 7시 산울림 소극장. 1만2000∼2만원. 02-334-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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