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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재의 영화이야기]'영화 아카데미'의 빛과 그늘

입력 | 2001-10-25 18:15:00


얼마전 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연출한 봉준호 감독이 남긴 ‘전화요망’이라는 메모가 있었다.

짧은 순간 반가움과 두려움(?)이 엇갈렸다. 봉 감독은 엉뚱하다. 그리고 두렵다. 상식을 뛰어넘는 관찰력과 가끔 상대방을 시험에 들게 하는 ‘잔혹한 유머’가 그에게는 있다.

▼한국영화 부흥의 '사관학교'▼

4월의 일이다. 한밤중에 전화가 울렸다.

“차 대표님! 저 준혼데요.”

“무슨 일이야? 이 밤중에….”

“제가 이번 홍콩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수상했는데요. 상금이 있거든요, 1만달러 정도.”

속물인 나는 얼른 “US 달러든? 홍콩 달러든?”이라고 반문했다. 이에 준호는 상금이 US 달러인데 자기 작품이 우리 회사에 손실을 크게 낸 ‘죄’가 있으니 상금의 절반을 회사에 내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 …’(감동과 짧은 망설임의 뜻)

나는 “그거야 감독상 상금인 데 봉감독 몫이지”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기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차 싶었다. ‘뻥이야’다. 상금은 애당초 없었다. 한밤중에 또다시 ‘녀석’의 시험에 든 것이다.

이번엔 뭘까. 이전의 악몽을 떠올리며 전화를 들었다. 내용은 자신이 동기회 부회장으로 있는 ‘영화 아카데미’의 체육대회에 협찬금을 얼마나 내겠냐는 것이었다.

사실 난 따지고 보면 1984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영화 아카데미의 최대 수혜자의 한 사람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임상수 감독, ‘모텔 선인장’의 박기용 감독, ‘화산고’의 김태균 감독 등 내가 주로 작업해온 감독들이 모두 아카데미 출신이다. 한국 영화계도 큰 신세를 지고 있다. 아카데미 출신의 감독 50여명이 현재 충무로를 주름잡고 있으니까.

영화 아카데미 이전에는 도제식 영화 교육이 주류를 이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이명세 감독은 ‘입봉(감독 데뷔)’에 10년은 족히 걸렸다.

하지만 아카데미라는 전문 교육 기관이 생기면서 입봉 시기는 빨라졌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감독이 잇따라 나타났다. 지난해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한 봉 감독의 나이는 31세였고 3년만의 입봉이었다.

▼열악한 예산에 벼랑끝 몰려▼

그러나 한국 영화의 미래가 밝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요즘, 아카데미는 침체에 빠져 있다. 열악한 예산 때문에 장비는 노후화됐고 교수를 확보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이제 영화 아카데미는 ‘토끼’를 다 잡고 솥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냥개’신세가 된 것일까.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tcha@sidu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