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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부천필 ‘아침이슬 30년’ 연주회 김민기대표

입력 | 2001-10-25 18:24:00


“70,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이들에게 김민기형의 ‘아침이슬’은 ‘우리시대의 애국가’나 다름없었다.”

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던 시인 황지우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6·25동란’으로 막이 오른 50년대에 태어나 70년대 ‘유신시절’에 대학을 다니고 지금 ‘국민의 정부’에서 40대 중후반을 보내고 있는 이 땅의 이른바 ‘475 세대’는 ‘김민기형’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임헌정이 지휘하는 부천필하모닉은 31일 오후 7시반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아침이슬’ ‘친구’ ‘작은연못’ ‘상록수’ ‘가을편지’ 등 30년 간 모진 시련 속에서 ‘살아남은’ 김민기의 노래 30여곡을 연주한다. 바리톤 최현수가 ‘가을편지’와 ‘상록수’를 부르고 ‘아침이슬’을 합창하며 막을 내리게 된다.

구미에서 대중음악가의 작품 만으로 콘서트를 갖는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다. 1970년대 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시험적으로 비틀스 등의 작품을 관현악으로 편곡 연주한 뒤 ‘오케스트럴 팝’은 당당한 교향악단 활동의 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부천필의 ‘클래식 김민기’처럼 서정적 발라드 계열의 작곡가를 주제로 공연하는 사례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첫 앨범을 낸지 30년 만에, 그리고 나이 50에 한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에 의해 자신의 음악을 헌정받게된 김민기는 “고맙고 과분하다. 그러나 공연장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무척 곤혹스런 표정으로…. 그는 분명 가지 않을 것이다. 99년 11월 2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기라성 같은 포크계열 후배 가수 수십명이 ‘김민기 헌정콘서트’를 열었을 때도 그는 제주도로 ‘달아났었다’. 당시 그는 “후배들이 나를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지휘자 임헌정(48)은 말한다. “평소 김민기씨와는 교분이 없었다. 그러나 그 분이 진지하게 살아온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응했다. 그 분을 무대에 세우거나 객석에서 인사를 시킬 계획도 없다. 하지만 ‘아침이슬’은 참 명곡이다. 구성이나 멜로디 화성이 정말 잘짜여져 있다”고.

석양이 짙어가는 23일 오후 6시경. 김민기의 ‘직장’인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학전블루’ 3층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곡기(穀氣)보다 주기(酒氣)를 더 좋아하는 그는 거나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신은 또렸했다. 그가 자신을 ‘저항가수’로 자리매김하거나 ‘아침이슬’에 관해 얘기를 꺼내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여서 최근 다녀온 ‘지하철 1호선’의 중국공연 소감부터 물어봤다. 중국 언론은 이미 “‘지하철 1호선’을 통해 비로소 ‘한류(韓流)’가 한국문화 예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됐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공연성과가 대단했다던데….

“상해에서 4회, 북경에서 5회 공연했는데 더러 빈자리가 있었지만 중국식 개념으로는 ‘완전매진’이었어. 암표상이 등장할 정도였으니까. 내용이나 형식이 모두 잘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중국의 지도층과 문화 예술계 인테리들이어서 그런지 ‘컬쳐 쇼크’를 받은 것 같았어. 중국인들의 진정한 고민에 대해서도 알게됐고….”

-김민기란 사람을 알아보던가요.

“누가 그러대. ‘당신이 젊어서 한국에서 고달팠다는데 함께 고생했던 당신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그래서 ‘다 자기들 일하고 있다’고 했지 뭐.”

이쯤에서 본론을 꺼내고 싶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중국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어떤 혁명이든 항상 ‘딴따라’들이 맨 앞에서 들러리 서는 것 아니야? 중국 문화 예술인과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된 지금 우리들의 작품과 문화에는 ‘인민(人民)’이 없어졌다’고 자탄하고 있었어.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한류’가 중국에서 좀 뜬다고 생난리를 치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간 곧 거품이 빠질 것이 분명해. ‘한류’라는 용어자체가 중국에 대한 결례야. 이 말이 꼭 제목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줘. 중국이 변하는 것이지 ‘한류’ 자체가 탁월해서는 아니거든. 서로 존중하는 것이 문화의 출발이고, 문화를 팔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고민을 함께하는 것이 문화교류의 목표이자 화두(話頭)야. 우리 정말 겸손해야 한다. 중국은 절대 간단한 나라가 아니야.”

30분쯤 지나 한구석에 놓여있는 낡은 통기타를 슬그머니 집어들며 말머리를 돌렸다.

-기타 안 만진지 오래됐죠. 그나저나 이번에는 또 어디로 도망갈 거예요.

“몇년 전 누가 갖다놓고 가기에 그냥 둔거지 내 생활은 아니야. 저게 내 생활처럼 비쳐지는 건 정말 싫다. 이번엔 일 속으로 도망칠거야. 일본 순회공연도 준비해야지. 내가 무슨 ‘원로’야? 국내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단원들이 1시간동안 내 곡을 연주한다는데 50세 밖에 안된 내가 부끄러워서 어떻게 자리를 지키고 있겠어. 난 아직 ‘현재 진행형’이야. 지난 것 가지고 폼잡고 있을 시간이 내겐 없어.”

-그래도 좀 너무한 것 아니예요? 준비해준 사람들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자기가 만든 ‘자식’들을 그렇게 섭섭하게 대하면 되겠어요.

“그렇지 않아. 너무 부끄러워. 87년 이한열군 장례식과 ‘6월 항쟁’에서 100만명이 동시에‘아침이슬’을 부르는 것을 보면서 소름이 끼치고 무서워 하늘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어. 내가 만든 노래들은 이미 내 노래가 아니야.”

‘고지식한 인간’이자 ‘아름다운 꼴통’인 가객(歌客) 김민기는 51년 전북 이리에서 태어났다. 유복자로 10남매의 막내였다. 의사였던 부친은 부르주아로 몰려 6·25 때 패퇴하던 인민군에게 학살됐다. 열한살 때 서울로 이사온 그는 재동국민학교와 경기중고를 다니면서 그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고교 때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던 셋째 누님이 선물해준 클래식 기타가 그의 일생을 바꿔버렸다.

그의 삶은 이후 ‘10년 주기(?)’로 큰 변화를 맞는다. 71년에는 ‘친구’가 들어있는 첫 앨범 ‘김민기’를 냈다. 모노사운드 2도 색상의 이 허름한 앨범은 그의 노래가 금지되면서 우리 문화사의 ‘전설’이 됐다. 그의 앨범은 카세트 테잎으로 수 없이 복제돼 당시 대학생들사이엔 최고의 ‘의미있는 선물’로 교환됐다. 작사 작곡 노래를 한 그는 정작 500장 정도 발매된 이 앨범을 갖고 있지 않다. 81년에는 전북 김제에 이어 경기 전곡에서 민통선을 드나들며 소작농을 시작했고 91년에는 학전 소극장을 개관해 10년째 고군분투하며 꾸려나가고 있다. 85년 8월31일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이미영과 결혼, 종화 소윤 두 아들과 함께 일산 호수마을에 살고 있다.

-몇년 전 스크랩에서 극단운영 하느라 진 빚이 5억원가량 된다는 기사를 봤는데 아직 다 못갚았지요? 그런 점에서 솔직히 말해 좋은 극단운영자는 못된다고 생각하시죠.

“아니 한 1억쯤 갚았어. 이제 4억쯤 남았지. 이번 일본 공연도 좀 돈이 될거야. 하지만 IMF 때 한달 빼놓곤 월급 밀린 적은 없어. 애들 돈 못주면서 공연할 거라면 난 차라리 문을 닫겠어. 이래봬도 나를 도와 주는 분들이 꽤 있다구. 빚얻는데 한계가 올 때 까진 내가 버티고, 그 담엔 누가 나서 주겠지….”

그가 한참 재정적으로 힘들어 할 때 한 친구가 그를 고위층의 아들에게 소개했다. 고위층의 아들은 김민기의 열렬한 팬이었고 기꺼이 후원자가 되고 싶어 했다. 어렵사리 자리를 같이한 그는 하지만 “아직 나 스스로 준비가 안됐다”며 고사했다. 그가 어떤 몸가짐으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는 이밖에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앞으로 뭘 더 할거죠.

“경극(京劇)과 가부키(歌舞伎)를 한국사람들 입맛에 맞게 만들어보려구. 그 다음에 우리 것을 그 문법에 맞춰 들여다 보고 싶어. 그리고 나 십년 뒤에는 분명 그림을 그리고 있을거다.”

김민기. 그는 우리에게 낮은 목소리가 큰 목소리 보다 더 크고 위대하며, ‘뒤’로 숨는 것이 ‘전면’에 나서는 것 보다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순수’와 ‘결벽’을 온 몸으로 증거했다. 누구 보다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70∼80년대를 지나왔으면서도 그는 시대와 사회에 아무 댓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점 부끄러울 것 없는 자신의 노래와 삶을 늘 ‘죄송스러워’ 했다. 성철스님이 조계종 종정 시절이던 80, 90년대에 종단과 권력자의 숱한 요구와 권유에도 불구하고 해인사 백련암에 틀어박혀 불교의 자존심을 지켰던 것처럼, ‘민기형’은 그냥 이 모습 그대로 늙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그려보는 ‘70년대 키드’들은 31일 밤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그의 ‘주인없는 음악회’를 찾아가 힘찬 박수를 보내줄 것이다.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