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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미디어 제국을 꿈꾸는 아메바기업 '초록뱀'

입력 | 2001-10-29 18:47:00

왼쪽부터 이상백, 김태원, 김기범, 고병기씨


“백설공주 드라마를 만든다면, ‘말하는 거울’을 상품화해 보면 어떨까요?”(윤송이 박사)

“‘인공지능 로봇’이 일본에서 실패한 거 몰라? 조직을 좀 단순화시키면 모르겠지만.”(고병기 박사)

공학박사 둘이 ‘차세대 미디어 콘텐츠 개발 기획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이곳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초록뱀’ 사무실. 이들을 포함해 ‘미디어 컨설턴트’를 자처하는 3명이 더 모여 ‘초록뱀’의 경영진 혹은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진보된 미디어 세상으로

이들은 자신의 기업을 벤처기업도, 프로덕션도 아닌 ‘아메바 기업’이란 새로운 장르로 정착시킬 것이라고 한다. 최고 경영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각자의 주특기를 살려 의사결정을 내리는 독특한 시스템 때문이다.

이들은 한 대기업체가 디지털방송 시대를 대비해 현행 케이블TV의 방송망을 디지털화하기 위해 기획한 프로젝트에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가 ‘우리도 미디어 제국을 만들어 보자’며 의기투합해 뭉치게 됐다.

윤송이씨

초록뱀에 기술자문역으로 참여하고 있는 윤송이 박사(26)는 넘치는 아이디어와 창의력으로 유명하다. 환경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변신이 가능한 초록색 도마뱀을 생각해 ‘초록뱀’이란 이름을 만들어 낸 것도 윤 박사의 아이디어.

그는 과기고와 과기대 출신으로 MIT 미디어랩에서 약관 24년 2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국내에 들어와 매킨지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이번 학기부터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야간에 ‘언니 오빠 아저씨’뻘 수강생들을 상대로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미래’를 강의하고 있는 그녀는 특히 인터랙티브(쌍방향)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다. 윤 박사의 ‘순진한’ 기획안은 과학원 선배인 고병기 박사(37)의 도움으로 좀 더 어른스러운 시각으로 승화된다.

‘뽀뽀뽀’ 같은 유아용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어린이가 직접 캐스터네츠나 트라이앵글을 들고 율동을 할 수 있게끔 해준다든지, 퀴즈프로나 경마프로의 경우 시청자가 직접 방송에 참여해 정답을 맞히고 돈을 걸 수 있게 한다는 것.

이들은 여기까지만 연구해준다. 이런 장치가 수익사업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방송프로듀서의 몫이다. 궁극적으로는 방송과 통신, TV와 컴퓨터, 음성 영상과 데이터 등을 합한 새로운 디지털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이 두 박사의 목표다.

◆'고려 상인'을 꿈꾸며

실무로 방송을 담당하다 ‘초록뱀’의 창설멤버가 된 사람은 김기범(38), 김광일(37), 이상백씨(37) 등 3명. 이들은 주로 장기적 안목에서 ‘한류(韓流) 마케팅’을 담당한다.

김기범씨는 SBS 드라마제작국 PD로 일하며 ‘토마토’ ‘청춘의 덫’ ‘경찰특공대’ 등을 연출했으며 드라마 제작자로는 드물게 뉴스프로에 쓰이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나잘란 박사’를 만들어 히트를 시키기도 했다. 김광일씨는 SBS 개국특집프로인 ‘머나먼 쏭바강’의 편성제작을 담당했고, 이상백씨는 음악전문케이블 KMTV에서 ‘쇼 뮤직탱크’를 성공적으로 연출한 것이 계기가 되어 36세의 나이에 NTV 편성기획국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PD 중 좌장격인 김기범씨는 원래 현대그룹 비서실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92년 대선에서 정주영씨가 이끄는 통일국민당의 부대변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행사의 기획, 재정관리 등을 담당하며 ‘비즈니스’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송나라가 흥했을 때 고려 상인이 번창했죠. 한류 바람이 부는 지금 방송실무경험과 비즈니스 경험을 함께 갖춘 덕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홍콩의 왕자웨이 감독과 SBS가 만든 합작기업에 제작자로 참여해 200억원을 받고 중국 수출용 미니시리즈 100부작을 제작하기로 계약했다. 또 중국 후난성 TV와 공동으로 안재욱을 주연으로 하는 TV드라마 ‘아파트’를 제작키로 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

'태권패밀리'의 캐릭터들

10여년 전만 해도 ‘지명수배자’였던 김태원씨(37)는 지금은 ‘로봇태권브이’를 디지털 코드로 바꿔 리메이크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해 ‘초록뱀’으로 영입됐다.

그는 고려대 법과대 재학시절인 87년에는 ‘6·10 항쟁’의 도화선을 지폈던 ‘반미청년회’의 선전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제가 몸담고 있던 한미문제연구소가 임수경양 입북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10여년 전 남산 안기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죠. 수사관들과 사상논쟁을 벌이다 ‘결국은 다 똑같은 애국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가 무엇을 해야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김씨는 결국 ‘문화발전만이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결론을 내리고, 부가가치가 높은 애니메이션계에 투신하게 됐다.

◆에필로그

‘아메바 기업’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디지털프로그램 제작과 부가사업 개척, 한류마케팅, 연예매니지먼트, 애니메이션 제작 등의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자기가 맡은 분야의 주특기를 살려가며 결국은 유기적으로 결합된 ‘디지털미디어 인프라’를 구축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들은 “루퍼트 머독에게 ‘초록뱀’을 팔아먹는 것이 최후의 목표”라고 입을 모았다.

◆'아메바 기업'이란?

‘아메바 조직’은 2000년대 들어 부상하기 시작한 경영이론 중 하나. 연체동물처럼 필요에 따라서는 분리될 수도 있어야 하며 합쳐질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경영자의 리더십도 아메바처럼 유연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아메바 경영은 일본의 첨단 세라믹 기업인 교세라에서 시작하여 성공을 거두고 다른 여러 기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구에서는 비슷한 형태인 ‘미니 프로핏 센터(Mini Profit Center)’ 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업의 조직을 이익을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로 나누고 스스로 운영해 나가도록 해 구성원의 창의력을 살리도록 하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cij19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