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오후 6시반 서울 여의도 CCMM빌딩 6층 시티클럽에선 이색적인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출판기념회 주제는 ‘한국인의 자화상-30권의 저서에 나타난 시대별 정신건강’.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시형(李時炯·67)씨의 30권째 저서 ‘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출판기념회였다.
‘이시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중심으로 이씨 몰래 기획한 행사였다. 가수 조영남씨, 방송인 박찬숙 성세정씨, 시인 박노해씨, 역사작가 신봉승씨, 이슬람전문가 이희수 한양대교수, 변호사 손광운씨 등 25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1982년 ‘배짱으로 삽시다’ 출간 이래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30권의 책을 내 모두 400만부가 팔려나갔다. ‘배짱으로 삽시다’는 무려 18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정신과 전문의의 인기를 이끌어온 스타 의사 이시형씨. 이씨는 현재 동남신경정신병원과 강북삼성병원의 정신과 전문의이자 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 등을 맡고 있다. 이씨는 병원 밖에서 왕성한 집필활동과 방송 강연 등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의 발언은 과연 우리 사회의 정신적 병폐를 어떻게 치료하고 있는 것일까.》
이시형씨는 기자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 그의 스케줄의 빈틈을 파고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기자는 그의 시간을 두 차례로 쪼개 만났다. 한 번은 오후 진료를 마치고 퇴근하기 직전까지(그는 퇴근 이후가 더 바쁘다), 또 한번은 오전 출근 이후 진료 시작 전까지.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동남신경정신병원을 찾았을 때, 퇴근 무렵인데도 병원은 환자로 붐볐다.
-너무 바쁘신 것 같은데요.
“늘 진료나 강연 모임 때문에 하루도 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난 27년동안 딱 하루 쉬었습니다. 지난해 여름, 과로 탓에 몸살이 나서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보면 정신과 의사들의 전성시대 같습니다. 방송에 신문 잡지에, 선생님처럼 책을 쓰는 분들도 부쩍 늘었는데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지금이 아마 한국 역사상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대인관계는 점점 어려워지고…. 그래서 정신과 의사가 인기를 끄는 거겠죠. 게다가 정신과에 대한 인식도 좋아졌어요. 과거엔 미친 사람만 상대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릅니다.”
-선생님의 인기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솔직하게 글을 쓰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글이나 강연 내용은 모두 생활에 젖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거겠죠. 그리고 제 강연은 쉽고 재미있습니다. 일반인들이 무심히 넘기는 것도 정신과 의사의 눈에는 여지없이 걸려들지요.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앞사람에게 버튼을 눌러달라고 하지 않고 왜 굳이 사람들을 밀치면서 직접 버튼을 누르려 하는지, 그런 겁니다. 이런 걸 얘기하면 보통 사람들은 신선하게 생각합니다. 책도 마찬가지예요. 특히 저는 호흡이 짧고 속도감이 있게 글을 씁니다. 그것도 인기 비결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출판기념회에선 그의 30권 에세이를 시대별로 나누어 당시 상황과 연결지어 보여주었다. 바로 한국인의 정신적인 자화상이다. 1982년 출간된 ‘배짱으로 삽시다’엔 급격한 도시화 물결 속에서 정신적으로 우왕좌왕하는 한국인에게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 자신감을 제시했고, 1983년 출간된 ‘자신있게 사는 여자’에선 페미니즘의 붐에 맞추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대학입시제도가 급변하던 1997년에 나온 ‘그래도 대학은 보내야지’에선 입시지옥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제시했고, 이번에 출간된 ‘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의 메시지는 위기에 몰린 한국 사회에서 대안을 모색하자 것이다.
-선생님의 책 내용을 놓고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니냐는 얘기지요.
“맞아요. 우리의 일상을 소재로 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그 때 그 때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내용이 담겨 있어요. 저 개인의 시각 변화도 들어있습니다. 지금처럼 나이가 들어선 ‘배짱으로 삽시다’같은 과감한 책을 못써요. 지금은 붓대의 힘이 빠졌습니다. 대신 깊이와 여유가 생겼습니다. ”
비판적인 질문에도 그의 대답은 억양이나 분위기에 전혀 흔들림이 없이 차분하고 여유로웠다.
-30권의 에세이를 보니, 분야가 다양합니다. 정신과 의사라고 하지만 너무 많은 분야를 다루는 것 같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과신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제가 다뤄온 그 정도의 이야기는 어느 정신과 의사라도 다 볼 수 있는 내용이예요. 바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니까요. 저의 전공은 사회정신의학입니다. 사회정신의학자는 사회현상을 보는 눈이 훈련되어 있습니다. ”
-예를 들어 대학입시문제를 정신과 의사가 건드릴 수 있는 건가요.
“물론 정신과 의사가 입시 그 자체를 건드려선 안되지요. 그러나 입시라는 것은 우리 생활 속에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입시와 가족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예요. 저는 그런 측면에서 생활 속의 입시를 말하는 겁니다. ”
-정신과 전문의들이 관심을 갖는 중 하나가 콤플렉스가 아닌가 싶은데요. 선생님도 콤플렉스가 있나요. 있다면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저도 콤플렉스가 많습니다. 제 얼굴을 잘 보세요. 어릴 적, 못 생겼기 때문에 별명도 많았습니다. 튀기, 뺑코, 깜둥이 등등 이런 말을 듣고 자랐는데 그게 심한 콤플렉스였지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 40대를 지나면서 ‘잘 생겼다’, ‘여자에게 인기가 많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때부턴 그게 저의 콤플렉스였습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제가 75년에 교수직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80년대부터 대중적인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인기를 얻었지요. 그 때가 40대 중반이었는데, ‘방송에 나오다 보니 인물이 좋아졌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좋겠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저에 대한 일종의 질투나 비난 같은 것이었지요. 공부하지 않고 인기나 얻으려고 하는구나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건 제게 콤플렉스였고, 그래서 그걸 극복하려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정신의학 학회에 늘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책을 많이 쓴 것도 그런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어쨌든 저는 대한민국 최고의 정신과 의사라는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정신과 전문의다운 분석이었다.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았다.
-팬들은 남자가 많습니까, 여자가 많습니까.
“책 독자는 잘 모르겠지만, 강연의 청중 여자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아줌마들을 위해 한마디 해주시죠.
“가정도 소중하지만 가정 못지 않게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주부들은 너무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 있어요. ”
-남자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
“‘남자니까’ 하는 허세를 벗어야 해요. 아내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한결 편해질 겁니다.”
-그렇다면 강연이나 책에서 주장한 ‘남자는 부인의 출산 장면을 보지 말라’는 말씀과 모순이 아닌가요. 최근엔 출산을 지켜보는 것이 부부간의 애정이라고들 생각하는데요.
“부부가 산실에 같이 있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제 말씀은 아기 낳는 장면은 직접 보지 말라는 겁니다. 기가 약한 남성은 출산장면을 보고 놀라요.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옵니다. 남성들에게 여성의 그 곳은 신비스러운, 생각만해도 두근거리는 낭만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출산 장면을 직접 보면 그 신비감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거지요.”
그는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은 강하고 단호해 보였다. 그가 정신과 의사가 된 과정도 그렇다. 1959년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을 마친 뒤 그는 1963년 미국 예일대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인턴을 했다.
그 때부터 그는 휴머니즘 성향이 강한 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싶었다.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의 예일대에서. 그러나 다른 의학 분야와 달리 정신과를 하려면 영어를 잘 해야했다. 정신과는 환자와의 대화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도록 영어를 공부했다.
그는 한 번 결정하면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40여년 간 정신과 의사의 길을 걸어온 그는 “지금도 난 정신과 의사로서 가장 화려한 의사”라고 자부한다. 그는 또 사람들과 많이 어울린다.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 ‘지도자를 생각하는 모임’ 등 30여개의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
-혹 전 현직 대통령과의 인연은….
“전혀 없어요. 과거에 찬사 연설을 써달라는 제의도 있었지만 정치와 연결되고 싶지 않아서 인연을 맺지 않았습니다. 정치 관련 모임에 관심 없어요. 정신과 의사로 남는 것이 저의 영원한 꿈입니다.”
kplee@donga.com
▼문화인류학자 이희수(한양대 교수)가 본 이시형▼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이시형박사는 균형있는 사고, 열린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은 문제 의식은 강하지만 다양한 세계에 대한 종합적이고 균형있는 사고는 부족하다. 서양 정신의학을 공부했지만 우리 문화나 이슬람 문화 등 제삼세계에 대한 관심도 크다.
그는 또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인물이다. 결혼식에 부조금 내지 말자고 하면, 그는 결혼식에 가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장기를 기증하자고 하니 그는 이미 장기 기증 유언장을 써놓았다. 1999년 터키 대지진이 발생해 터키 돕기 운동을 펼칠 때, 이 박사는 몇 개월 동안이나 그것에 매달렸다. 나와 남, 우리 문화와 남의 문화를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신경정신과 의사 김병후(김병후정신과 원장)가 본 이시형▼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력적이다. 이박사는 있는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을 찾아 창조적으로 일한다. 특히 최근엔 혼자 지내는 아이들, 즉 외톨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새로운 문제를 찾아 관심을 기울인다. 세상의 향해 그의 감각은 열려있다. 이것은 정신과 의사로서 중요한 덕목의 하나다.
그는 또 사람의 장점을 부각시켜부고 단점이 있다면 자기 스스로 깨닫고 고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어느 하나에 치우치거나 갇히지 않는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 카리스마도 강하고 색깔이 뚜렷하다. 언제나 일처리가 명료하다. 욕심히 굉장이 많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