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특히 교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깨뜨려서는 안 되는 윤리며 규범이다.
▼학생 볼모로 파업한다면…▼
선생은 쉼없이 지식을 연마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교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선생은 한시도 책을 놓을 수 없고, 어느 때고 학생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교실 안에서만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실 밖에서도 학생을 가르친다. 지식만 학생에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덕행도 손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선생은 가르치는 일을 어느 때고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열의를 쏟아야 하고, 온몸에 땀이 배이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열의도 쏟지 않고 심혈도 기울이지 않는 것, 가르치는 둥 마는 둥, 대충 시간만 때우는 행위는 교직자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더구나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업을 중단한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
선생이 노조를 만든다는 것, 이것은 ‘죽는 일이 있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노조를 꼭 만들고 싶으면 교직을 떠나서 자동차공장으로 가라. 방직공장으로 가라. 자동차 노조, 방직 노조는 물질을 담보로 파업을 한다. 혹은 태업을 한다. 그건 얼마든지 가당한 일이고, 경우에 따라선 얼마든지 도덕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노조를 만들어 파업을 하면 그건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을 볼모로 하는 일이다. 학생을 볼모로 파업을 한다는 것, 혹은 태업을 한다는 것.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런 발상을 하고도 학생 앞에 설 수 있는가. 얼굴이 뜨거워 어떻게 학생을 마주칠 수 있는가. 심장이 돌이라도 그렇게 될 수는 없고, 가슴에 철판을 깔아도 그렇게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선생은 그저 가르치고 돈만 타먹는, 그러기 위해서 교단에 서는 그런 월급쟁이가 아니다. 선생은 언제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언제나 사명감에 불타야 한다. 선생의 눈은 그 의무감으로 불꽃이 일어야 하고, 선생의 피는 그 사명감으로 끓어올라야 한다. 불꽃이 일지 않는 눈, 끓어오르지 않는 피, 그것은 선생의 눈이 아니며 선생의 피가 아니다. 그런 선생이 노조를 생각하고 파업을 기도한다. 왜 학부모가 선생을 폭행하는가. 선생이 그런 가당치도 않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Horatio Nelson) 동상의 비명은 바로 우리 교직자의 비명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넬슨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그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을 애도하기 위해 이 동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의 비길 데없는 생의 광영을 현양하기 위해 이 동상을 세우는 것도 아니다. 의무가 요구할 때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 그 교훈과 모범을 우리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보이기 위해 우리는 여기 이 동상을 세운다.’
이 뿐만 아니다. 이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오로지 승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적나라한 국제경쟁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교육밖에 없다. 그것도 ‘최고’ 의 교육밖에 없다.
▼시대의 변화에 무지▼
오로지 ‘교육’ 으로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 교육발전을 다른 사람들이 아닌 교직자들이 망치고 있다면 이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 교직자들의 일부가 하고 있는 행위는 시대의 변화에 너무 무지하고 시대의 변화를 너무 거스르고 있는 행위다. 지금 그 일부의 우리 교직자들이 하고 있는 행위는 명백히 교육붕괴를 자초하는 행위이며 그리고 더 명백히는 이 세계화 시대에 요구되는 인재를 기르지 못하는 행위이다. 지금 우리 교육은 평균인 지향의 교육이 아니라 수월성(excellency) 지향의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교육제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 또한 교직자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교직자들은 어디에 초점을 두고 행동하고 있는가.
송복(연세대 사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