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다음 전당대회 때 민주당 총재직 이양’ 카드를 꺼냄으로써 민주당의 혼돈은 당분간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김 대통령은 총재직 이양 의사 표명으로 사실상 당무에서 손을 떼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제 홀로서기에 나서야 하는 민주당은 당권 투쟁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후임 총재를 뽑기 위한 전당대회 실시 시기를 둘러싸고 각 계파가 사활을 건 힘겨루기를 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대표가 아니라 후임 총재를 뽑는 전당대회는 대선후보도 함께 뽑는 전당대회가 될 가능성이 커 민주당은 급속도로 경선 국면으로 치닫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대선후보 조기가시화로 가닥이 잡히는 셈이다.
대선후보까지 뽑는 전당대회라면 당헌상으로 예정돼 있는 내년 1월 23일 전당대회 개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한광옥(韓光玉) 대표 체제를 유지키로 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당장 쇄신파와 ‘반(反) 이인제(李仁濟) 최고위원 그룹’은 김 대통령이 내년 4월 전당대회론(이인제 최고위원측 입장)‘이인제 대세론’에 힘을 실어주려는 것 아니냐며 극도의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정동영(鄭東泳) 최고위원은 당장 한 대표가 김 대통령의 결심을 전하기 위해 소집한 8일 오전 지도부 간담회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민주당의 내분이 또 다른 양상으로 격화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 대통령은 총재직 사퇴 논의는 꽤 오래 전부터 진행돼 온 것으로 보인다. 김 대통령은 몇 개월 전부터 사석에서 “국정 운영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통령은 ‘집권당 총재’라는 직함이 야당 공세의 빌미가 됨으로써 오히려 국정 운영의 걸림돌이 되는 현 정치 구조에 피곤함과 싫증을 느껴왔다는 것. 게다가 최근 민주당 내분 격화와 함께 당 장악력이 현저히 저하되면서 통제 불능의 상태로 접어들자 김 대통령은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는 것이 여권 핵심 인사들의 전언이다.
김 대통령은 끊임없는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야당의 표적이 되는 것보다는 현실 정치에서 한걸음 비켜서 경제 회생과 남북관계 등에 매진할 경우 총재직을 버릴경우 야당의 협조를 얻기가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임기가 1년3개월여나 남은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직을 이양한 사례가 우리 정치사엔 없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나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은 차기 대선후보 선출과 함께 총재직을 후보에게 이양했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민주당 총재직에서 물러날 경우 김 대통령으로서도 상당한 위험 부담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우선 집권당이라는 울타리를 배경을 포기함으로써 향후 김 대통령의 주변에서 벌어질 수 있는 돌발사태에 대해 기민하게 대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김 대통령이 ‘2선후퇴 카드’로 현 위기 국면을 돌파한 뒤 동교동계나 중도개혁포럼 등을 통해 당 장악의 고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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