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혼자 꾸면 꿈으로 끝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스위스의 청년 실업가인 앙리 뒤낭이 1859년 이탈이아의 솔페리노 전투를 목격하고 품었던 인류애의 꿈이 오늘날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 그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그는 4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15시간 이상 계속된 이 전투를 목격하며 그 어떠한 명분으로라도 인간이 이러한 형태로 희생되어서는 안된다고 확신했다. 인종과 종교, 국가와 이념, 적과 동지를 초월해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즘을 실현하려는 이른바 ‘적십자 정신’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솔페리노의 꿈이 항상 무지개 빛을 발산하며 순조롭게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적십자인들은 지속적인 분쟁과 불화의 중심으로 달려가야 했으며 증오와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끊임없이 휩쓸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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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최근에 와서 세계화의 물결이 더욱 거세지고 다원주의의 도전이 한층 가열되는 현상을 나타내자 국가 권력은 약화되고 종교의 역할도 미약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개인의 원자화와 집단 이기주의, 광신적 열광주의가 혼재되어 인류는 또하나의 엄청난 재앙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적십자정신의 구현을 갈망하고 세계 적십자인들의 역할에 더 큰 기대를 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구나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실마리를 좀처럼 풀어가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 기대와 열망은 더욱 절박해질 수 밖에 없다.
대한적십자사의 서영훈 총재가 지적했듯이 ‘솔페리노의 꿈’(하늘재·2001)의 저자인 김혜남 한서대 교수는 ‘참으로 뛰어난 적십자의 일꾼’이었으며 특히 ‘한국 청소년 적십자운동에 큰 업적을 남긴 공로자’이다.
‘솔페리노의 꿈’은 국제인도법을 강의하고 있는 김 교수가 32년간 적십자에서 일하며 체험했던 숱한 추억을 모아 펴낸 책이다.
여기에는 적십자 정신이 무엇인지가 체험적으로 부각되어 있고 대한적십자 창립 이후 반세기 동안의 행적과 공과가 무엇인지 잘 그려져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분단된 조국의 나머지 반쪽을 인내와 연민을 갖고 상대해야 했던 기록이 자상하게 담겨져 있다.
이 책은 뒤낭이 지녔던 솔페리노의 꿈이 김 교수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 또 얼마만큼이나 이 땅에서 이루어져 왔는지를 기록한 구체적인 문서이며 동시에 미쳐 못다부른 노래를 위한 서사시이기도 하다.
그는 나이팅게일처럼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어디든지 갔으며 때로는 잔 다르크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적지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적십자는 휴머니즘”이라고.
김 교수의 영광과 고뇌는 적십자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것이다. 이제 그의 횃불은 누군가에 의해서서 전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가 도달한 지점에서 우리는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엄정식(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