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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정옥자/궁궐이 후궁들 싸움터라니…

입력 | 2001-11-11 18:33:00


요즘 TV에는 역사드라마가 한창이다. ‘여인천하’를 비롯해 ‘명성황후’에 ‘상도’까지 합세해 역사드라마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듯싶다. 이렇게 역사물이 활발한 데 대해 역사학자로서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대학교수들마저 역사드라마로 우리 역사를 배운다고 하는 판에 이들 드라마가 많은 부분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보지도 않은 세상을 고증을 통해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고증할 수 있는 자료들은 우연히 남아있는 것일 뿐이고, 꼭 필요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가 우리의 요구에 응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드라마도 드라마인 이상 상상력을 통한 허구가 동원된다.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거나 없던 사건도 끼워 넣고 극의 긴장도를 높이기 위해 사실을 과장하기도 한다.

▼역사 드라마 사실 왜곡 도넘어▼

드라마의 완결성을 높이거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그러한 작업은 피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할 수도 있다. 또 사소한 사실 고증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해도 이해할 만하다.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시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전혀 다른 세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 시대 여인들의 권력투쟁을 그리기 위해 현재보다도 더 자본주의적인 싸움을 붙이고, 개항 전후 풍전등화 같은 국가의 운명 앞에 산적한 현실문제들은 접어두고 오직 후계자 문제나 왕의 총애를 위해 갖은 요변을 떠는 후궁들의 접전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데 이르러서는 더 할 말이 없다.

그리하여 정작 국정을 이끌어가던 주체인 왕들은 평가 절하되고 있다. 중흥지주(中興之主)로 평가받던 중종은 소리만 버럭버럭 지르며 화를 내는 용렬한 임금으로, 망국의 세월을 살아간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처신하며 “미안합니다”를 연발하는 무능한 군주로 전락시키고 있다.

하긴 어느 여인이 자신의 소생을 왕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랴만 무리하게 그 일을 추진하던 후궁들은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오히려 구중궁궐에서 말없이 분수를 지키며 앞날을 기약해 드디어 자신들의 소생을 왕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일곱 명의 후궁들(장희빈만 제외하고)은 역사에 남아 있으니 그들의 넋이 잠들어 있는 곳이 칠궁이다. 시대순으로 열거하면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덕안궁(德安宮)이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으로 손자인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아버지인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해 왕의 어머니가 된 인빈 김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대빈궁은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으로 두 분은 숙종의 후궁이다.

연호궁은 진종(眞宗)의 생모인 정빈 이씨, 선희궁은 뒤에 장조(莊祖)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사당이다. 진종은 효장세자로 요절했으나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해 추존되어 정조가 그를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두 분은 영조의 후궁이다.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덕안궁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귀비 엄씨의 사당이다.

▼七宮 복원은 역사적 쾌거▼

이 일곱 개의 궁은 원래 다른 곳에 산재했지만 1908년 터줏대감 격인 육상궁터에 모이게 된 것이다. 국망을 눈앞에 두고 그 관리문제가 어려워지리라 예상한 황실의 의도보다는 황실의 재산을 노린 통감부의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청와대 서쪽에서 무성한 잡초만 키우며 보초병들이 ‘귀신 나온다’고 꺼리던 이 궁이 말끔하게 단장을 하고 일주일 후면 일반에게 공개된다고 하니 근래에 드문 쾌사다. 1968년 청와대 보안문제로 합사(合祀)까지 불사하며 훼손·폐쇄되었던 칠궁이 결자해지의 원칙으로 복원되었으니 문화재 보존 차원에서, 이 시대 연구자로서 갈증이 풀리는 기분이다.

다만 이곳은 종묘와 사직단과 함께 제의의 장임을 분명히 해 그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 관리자의 세심한 배려는 물론이려니와 관람자들도 역사를 배우는 교육의 장이지 노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했으면 싶다.

정옥자(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규장각 관장·본보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