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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봉칼럼]DJ ‘큰 정치’로 돌아가라

입력 | 2001-11-14 18:31:00


기업주의 운명은 시장에 의해 좌우되고 정치인의 운명은 투표에 의해 좌우된다. 지난 재·보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당의 총재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투표 결과에 대한 당내의 복잡한 저항에 책임을 진 것이라는 점에서 일단은 긍정적인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권력투쟁이라는 좁은 의미의 정치에서 벗어나서 국제정세, 경제, 월드컵대회, 아시아경기, 그리고 지방선거와 대선을 위해 큰 정치를 목표로 백의종군하겠다는 의지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역사로 봐서 과연 천명한 대로 나갈 것인지 의문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권 주자들의 족쇄에서 벗어나서 적당한 시기에 새로운 창당을 꾀하여 정치판도 전체를 바꾸고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충분히 개연성을 가진 것이라서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일인 듯하다. 만약 그것이 숨은 뜻이라면 큰 정치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 뻔하다.

▼정치 주도권 연연 말아야▼

지금 나라의 형편은 그동안 있어온 두 사람의 투사정치로 말미암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수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제 정치투쟁 능력과 국가경영능력은 전혀 별개라는 것을 시민들은 모두 인식하게 되었다. 노벨상에 따라오는 카리스마도 복잡한 산업사회의 문제들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고 말았다.

국력 수준에 대한 오판인지 아니면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북문제에 매달리는 동안 정부와 사회의 시스템 전체가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과거 이룩한 발전의 요인들로서 흔히 정부의 지도력, 기업의 활동력, 질 좋은 노동력, 그리고 교육된 인력 등을 꼽았는데, 지금 그 요인들 중 어느 하나도 성한 것이 없다. 이러한 요인들을 새롭게 추스르기 위한 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문제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파악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기획능력의 부재로 손을 대는 것마다 엉뚱한 부작용만 초래해 왔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중국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린 일을 접하고 역사적인 시간의 의미를 새삼 음미하게 된다. 중국의 발전시점은 ‘현재’에 속하는 것이라서 한국의 발전이 기도되던 60년대의 시점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의 출발은 수십년 전보다 훨씬 발전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당시 개발연대의 시스템과 조건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허덕여 온 터라 당연히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양 김씨의 통치기간은 한국사회의 발전적 요소들을 추슬러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할 역사적인 기간이었지만 결국 시간낭비로 끝나고 말았다.

현재의 제반 조건으로 봐서 앞으로 5, 6년 안에 이러한 상황이 바뀌어질 전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월드컵이나 아시아경기 등이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낼 리는 만무하다. 그것들은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일회적인 행사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한다.

▼욕심 버리고 국민에 봉사를▼

이런 전망을 놓고 본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진정으로 큰 정치로 돌아가서 국가적인 백서에 해당하는 분석과 계획을 만들어 다음 정권이 통치의 지표로 삼게 하는 일이라 판단된다. 정치투쟁이 치열해 가는 판국에 이는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왕 총재직까지 내놓고 대통령직에 충실하겠다는 결의라면 그 정도의 노력은 다해 국민에게 최소한의 비전은 갖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이는 또한 국민이 다음 정권을 선택하는 데 필요한 판단 근거의 역할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대통령은 어떠한 다른 욕심도 가져서는 안될 시점이다. 스스로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하여 초연한 입장에서 봉사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상황에서 아직도 정치게임은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국가적 상황이 U턴할 수 있는 형국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건국과 개발과 민주화에 버금가는 위업을 남기기에는 이미 시간이 지나고 말았다.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