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KBL 여름리그가 끝난지 채 열흘이 되지 않던 어느 날 유영주선수의 은퇴보도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시점으로보나, 은퇴를 결심한 이유 모두 90년대 여자농구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치고는 너무나 쓸쓸하고 초라한 은퇴기사였다. 하지만, 추석 연휴가 끝나자 유영주가 국민은행 코치로 계약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지도자로 첫 출발을 시작하는 유영주의 인연의 끈들을 되짚어 보았다.
▽소중한 인연 하나. 심욱규선생님과의 만남
유영주는 어린 시절부터 골격이 크고 뛰어 노는걸 좋아하는 여자 대장부 스타일이었다. 언니의 농구화가 부러워 무작정 송림 초등학교에서 운동을 시작한 그녀를 처음 눈여겨 본 것은 故 심욱규씨(前 인천방송 농구해설위원, 前 인성여고 감독)였다. 신체조건이 좋아 가능성있는 선수로만 평가됐던 유영주는 인성여고로 진학한 후 심감독의 매서운 조련으로 고교 랭킹 1위의 포워드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당시 스타 플레이어가 없었던 SKC로 진로를 결정했다. 주위의 만류도 있었지만 유영주는 묵묵히 심 감독의 뜻에 따랐다. 유영주는 한국 최고의 포워드로 성장했지만, 심 감독 앞에서는 늘 어린 중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인시절, 실업 생활에 적응이 안됐을 때도 그 앞에서 눈물을 쏟는 등 늘 아버지같이 기댈 수 있는 분이었다. IMF로 인해 팀(선경증권)이 해체된 것에 실망해 운동을 접으려했을 때 유영주의 등을 떠밀어 삼성생명에 보냈던 것도 심욱규씨였다. 그러던 심욱규씨가 올 봄 갑자기 췌장암 진단을 받아 병마와 싸울 때 유영주는 그가 운명할때까지 한달동안, 주말마다 빠짐없이 그의 병실을 찾았다.
▽소중한 인연 둘. 선경증권
그는 SKC(前 선경증권)에서 실업 1년차 때부터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자신의 포지션이었던 이금진 선수가 은퇴한 영향도 있었지만, 유영주의 플레이스타일은 기존의 여자농구 선수들의 포지션 파괴나 다름없었다. 국내 남자 농구에서 조차 파워 포워드라는 개념이 없었던 90년대 초였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파워 넘치는 플레이를 저지하기 어려웠고, 그는 포워드에 관한한 독보적이었다. 그런 유영주의 밑으로 현재 프로팀에서 간판 스타로 활약중인 김지윤, 정선민, 이종애 등의 잘난(?) 후배들이 속속 들어왔다.
실력만큼 개성이 강한 후배들과 이런 저런 일도 많이 겪었다. 농구대잔치 사상 첫 몰수패 사건, 팀 우승을 이루고도 MVP를 놓친 일, 98년 농구대잔치 우승 이후 믿기지 않았던 팀 해체 등까지 순탄치 않았지만, 사이 좋았던 후배들과의 그 시절이 가끔 그립기도 하단다. 98년 여자프로농구 대회가 열려서 이적 팀인 삼성이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낯설기만 했다. 리그가 끝난 후에, 그녀는 서로 다른 팀에서 싸워야만 했던 옛 동료들과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선경 시절은 온갖 애증과 추억으로 범벅된 아픈 추억이긴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기도 하다.
▽소중한 인연 셋. 종가집 시댁과 장손 남편
유영주는 98년 시아버지, 시어머니에 시할머니까지 있는 종가집 장손과 결혼을 했다. 집이 인천인지라, 남편은 독수공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국민은행 코치로 팀이 담금질에 들어간 현재에도 남편은 여전히 독수공방이다. 유영주의 남편 방경일씨는 자상한 남자다. 팀 훈련중일 때나, 재활 훈련 할때나, 벤치에 앉아 있을때도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묵묵히 격려하고 있다.
유영주 선수의 쓸쓸한 은퇴를 위로하기 위해 제주도 여행을 마련하기도 했다. 국민은행 코치가 되어 아이 계획을 미루게 되었을때도 자상하게 “우리 둘만 살지.. 뭐”라며 말하는 남편이기에 그녀의 마음은 늘 평안할 수 있었다. 시아버지는 뛰는게 아니라 한 시름 놨다고 하시고, 시어머니는 아이는 마흔전에만 낳으면 된다고 격려하고, 시할머니는 손부 장하다며 어깨를 두들겨 주셨다고 한다.
은퇴 후에는 남편에게 자기 손으로 밥도 해 먹이고, 그 동안 못했던 봉사를 하려했던 그녀의 계획은 다시 수포로 돌아간 듯 하다. 그러나 남편은 오히려 아쉬움 많게 끝낸 선수생활이니 코치로서 새로 시작해 명예회복을 하라며 따뜻이 손을 잡아주었다.
▽소중한 인연 넷. WKBL 첫 여성 코치
요즘 유영주는 새로운 경험들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국민은행 선수들에게는 따뜻한 언니에서 하루 아침에 선생님이 되어버렸다. 여자프로농구에서 첫 여성 코치(플레잉코치 제외)가 된 것이고, 첫 프로선수 출신 1호 코치가 된 셈이다. 유영주는 외부적으로 선례를 잘 남겨야겠다는 ‘언니’로서 부담감과 팀 리딩 선수가 없어 상위권 진출을 하지 못하는 국민은행의 “선생님”으로서의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처음이라서 정신없고, 선수들에게 파이팅 소리를 너무 지르다보니 자신이 더 배가 고파 선수들보다 밥을 많이 먹는다고 밝힌다.
지난 10월 19일 W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현장에서 전 소속팀 삼성의 유수종감독이 “유코치님”이라며 농을 걸자 “선생님, 왜 이러세요”할 정도로 유영주 코치는 새로 시작하는 이 일이 낮설고 설레이지만, 충실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가 삼성 시절에 벤치에 앉아보지 못하고, 재활을 하면서 그렇게 힘든 시간을 지내지 못했다면 이 자리에 있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부상중인 선수들이나 플레이 때문에 힘들어 하는 선수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테니까요. 이젠 감독님과 선수들 차이에서 조율을 통해서 국민은행이 더 재미있는 농구, 더 좋은 성적을 내는 팀의 일원으로 지내고 싶어요.”
이제 겨울리그에서는 “코트의 진실이”에서 WKBL 첫 여성코치로서 유영주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농구를 하며 우여곡절이 많았기에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단단하고, 속이 깊은 것 같았다. 그녀가 우렁찬 목소리로 선수들을 독려하는 모습에 이젠 박수를 보낼 일만 남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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