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나는 한번도 듣도 보도 못한 유경찬씨라는 분으로부터 손수 쓴 책을 선물받았다. 그 동안 내 글에서 교훈을 얻었다는 증정사와 함께 말이다. 자주 듣지 못하는 칭찬에 약해서 일까? 나는 책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그리고 재독, 삼독했다. 그만큼 유씨의 저서 ‘금융은 신음한다’(부·키,2001년)는 중요한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한국 경제는 지난 40여년간 고도성장을 구가해왔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기업의 수익률이 매우 낮고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천문학적이다. 속은 약체이면서도 겉은 번지르르한 한국경제의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금융은 신음한다’는 이 수수께끼를 상당부분 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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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과 금융은 냉철한 계산없이 끝없는 성장욕구를 발현하면서 과잉중복투자를 일삼았고 사업이 잘되면 과실은 자기가 챙기고, 안되면 손실을 사회보고 부담하라는 도덕적 타락 속에서 살아왔다. 한편 시스템을 관리, 감시할 책임이 있는 관리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은 채 구조조정의 캐치프레이즈 속에서도 게걸스럽게 확장만을 꾀하는 기업이나 은행을 수수방관해 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근본적 원인이었다.
유씨는 재벌, 금융, 정부가 어떻게 한국경제를 오늘날처럼 어렵게 만들었는가를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진단에 그치지 않고 처방도 내놓았다. 제5장 ‘금융산업발전의 초석’에서 ‘정책은 교통경찰이다’ ‘보수(補修), 보수(保守) 그리고 또 보수(risk management)’ ‘쉬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인사관리는 탄력적’ ‘상업주의 정신을 찾아서’ 등을 통해 한국금융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경제학자들은 현실을 잘 모르고 탁상공론만을 일삼는다는 말을 듣곤 한다. 반대로 시장참여자들은 경제학자들로부터 논리적 일관성도 없이 목전의 이익만을 위해 목청을 높인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그래서 이들간에는 의미있는 대화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은 한불종금에서 일했던 유씨의 풍부한 현장경험과 탄탄한 논리를 모두 구비하고 있어 이런 갈등을 푸는 데 적격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을 갈브레이드의 ‘금융환상의 약사(略史)’에 비견될 만한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학기 서울대에서 ‘화폐금융론연습’의 교재로 쓰고 있다. 굳이 옥의 티를 지적하라면 외국자본의 역할에 대해 실제보다 후한 점수를 준 것 정도라고나 할까. 그리고 엄격한 교정을 피해 나간 오자 몇 개가 눈에 거슬린다. 많은 사람이 읽고 금융에 관한 논의의 장을 넓혔으면 좋겠다.
정운찬(서울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