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자리에서 서로 반대쪽에 머리를 두고 잠드셨다. 특별히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다. 평생 고단한 세월 함께 짐을 져 왔으니 남은 인생 밤마다 팔베개를 하고 잠들어도 부족할 터인데, 한 분은 남쪽에 머리를 두고 한 분은 북쪽에 머리를 두는 이상야릇한 구도로 잠자리에 들었던 것은, 순전히 가난했던 시절의 습관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일자(一字)형의 초가로 아랫방 윗방 합쳐도 채 네평이 넘지 않았다. 그 작은 두 개의 방에서 누나 네 분과 부모님, 나를 합쳐 일곱 명이 자야 했으니까 나란히 누우려야 누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남쪽으로, 그 다음 어머니는 북쪽으로, 그 다음 나는 또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일곱 사람이 겨우 잠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온전히 내 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고향집을 떠나 강경읍내로 이사한 다음의 일이다. 누나들도 그 사이 모두 시집가는 바람에 식구는 셋으로 줄었고,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사방 8자가 채 안 되는 서쪽 방을 쓸 수 있었다. 철로가 가깝게 있어서 기차가 지날 때마다 구들장과 창틀이 다르륵 떨리던 기억이 아직껏 생생하다. 그 무렵의 나는 말수 적고 예민한 내성적인 소년으로서, 밤낮 없이 책에 빠져 살았다. 민중서관에서 펴낸 한국문학전집과 동아출판사, 정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부터 차례로 독파한 것도 기찻길 옆의 그 서쪽 방에서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는 줄곧 객지생활.
하숙도 하고 자취한 적도 있었으나 내가 청춘을 보냈던 모든 흘러간 방은 8자가 채 못되는 좁은 방이었으며, 대부분 음습했다. 그 중에서도 이십대 초반, 무작정 상경하여 한겨울을 지냈던 신당동 다다미 깔린 왜식 목조주택의 작은 방과 마장동 천변의 기차처럼 세로로만 길었던 어둔 방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하루 한끼도 더운밥을 못 먹는 날이 많았던 그 시절, 창 너머의 밝고 드넓은 바깥세계와 창 이쪽의 음습한 내 자의식 사이에서 때로 운 적도 많았으나, 대부분의 시간, 나는 목표를 정한 킬러처럼 불타고 있었다. 그때처럼 많이 쓰고, 뜨겁게 상처받고, 격렬히 꿈꾸던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싶다. 결혼을 한 다음에도 내가 지냈던 방의 크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단칸 셋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가 큰애 작은애를 얻고서야 비로소 방 두 개짜리 셋방으로 이사했는데, 큰방을 아이들이 쓰게 했기 때문에 내 방은 여전히 좁고 볼품이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처럼 속이 좁고 예민한 것은 어쩜 너무 작은 방에서 컸기 때문인지도 몰라. 당신하고 나하곤 작은방을 쓰고 큰방을 무조건 애들 방으로 하자고.’
아파트에 살 때에도 안방이라고 불러야 할 큰방을 나는 무조건 아이들에게 배정해 주었다. 내가 여덟 자 방을 면한 것은 화곡동에 살던 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태어나고 40여 년이 지난 뒤 비로소 방다운 방을 가졌던 셈인데, 나는 그때 이미 내 방의 넓이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내 방 또는 내 침대의 크기가 작아 받았던 불편함은 내 정신의 방이 넓지 못해 겪어야 했던 상처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신당동이나 마장동 천변의 좁고 어두운 방에 살 때, 내 영혼의 방이 지금보다 더 넓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삶을 이해하는 것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그 작은 방에서 홀로 지냈던 시절, 적어도 내 직관과 감수성은 훨씬 더 자유로웠던 것 같다.
젊은 시절이야 크고 넓은 침대를 갖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나이 들면 다르다. 드넓은 영혼의 방은 소유하지 못한 채 큰 방 큰 침대에 누워봤자 사방이 휑뎅그렁, 더욱 더 쓸쓸할 것이다. 그래서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도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종교적 단계’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을이 깊다.
나는 자주 생애를 통해 거쳐온 지난날의 작은 방들이 어디쯤 흘러가 있는지 찬찬히 돌아보곤 한다. 헛기침 애써 날리면서, 오로지 더 큰 방, 큰 침대만을 차지하겠다고 악쓰는 이 땅의 ‘노익장’들을 보면 참담해진다. 최소한 저렇게 늙진 않아야지, 한다.
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