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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사랑의슈터' 정인교의 새출발

입력 | 2001-11-19 19:21:00


자유계약선수가 되면서 재계약에 실패했던 정인교가 수련선수로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돌아오는 길이 쉽지 않았다. 코트에 설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코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시기에 은퇴를 하고 싶다’라는 외침이다.

지난 8월 초 수련선수로 코리아텐더 유니폼을 다시 입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정인교는 머리를 짧게 잘랐다. 뭔가 새롭게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2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심이 쉽지 않은 나이다. 거기에 머리를 자른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래도 ‘하나하나 밟아가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렸다.

그리고 인터뷰가 있었던 10월 10일은 머리를 자른 지 두 달이 훌쩍 넘어 버린 시기였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머리는 생각만큼 자라질 않은 상태였다. 아직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지 못한 그의 더딘 행보 만큼이나 머리칼도 성장을 쉬는 듯했다.

‘머리를 계속 짧게 가져갈 것이냐?’는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머리가 어울리는 32살의 수련선수

정인교는 벌써 프로 6년차다. 그 동안 팀도 여러 번 옮겼다. 나래를 시작으로 기아를 거쳐 코리아텐더에서 한 시즌을 보냈고, 올해는 FA선수로 다른 팀과 이적 접촉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코리아텐더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경기 출장도 불투명한 ‘수련선수’라는 이름까지 얹어졌다. 정인교 정도의 네임밸류를 가진 선수 중에 그만큼 팀을 옮긴 선수는 없다.

“어색합니다. 다른 팀으로 간 것도 아니고, 같은 팀으로 다시 돌아와서 수련선수라니요.”

팀내 최고참이 수련선수로 돌아왔다는 것이 새삼 쑥스러워졌는지 잠시 시선에서 멀어졌던 머리를 한번 만져본다.

“괜히 스스로 쑥스러워지면 후배들에게 농담을 던지곤 합니다. 야, 수련선수도 전지훈련 가도 되냐? 라는 식으로요.”

너스레를 떠는 그의 표정은 밝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밝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어색한 표정이다. 어딜 봐도 정인교라는 이름에 수련선수는 어울리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선 안되겠지만 이번 시즌을 잘못 보낸다면 지난 봄 계약에 실패했을 때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을 겪어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약에 실패해서 사라지는 그런 시시한 은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인교는 그래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이런 상황까지 몰리면서 농구를 해야 하나? 하는 마음에 다시 선수로 뛰겠다는 생각은 많지 않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농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지더군요. 아마도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겠지요.”

정인교가 말한 ‘다시 농구를 하기 위해’라는 것만으로도 돌아올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렇긴 해도 다시 코리아텐더로 돌아오는 길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후배들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생기고 무얼 하더라도 ‘수련선수’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그럴 것이다. 왜 있지 않은가? 밖에서는 아무 문제될 게 없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어딘가 어색해 지는 상황 말이다. 거기에는 수련 선수가 코트에 서기 위해선 기존의 한명이 부상 등의 특별한 이유로 코트를 떠나야 하는, 어울리기 힘든 위치라는 이유가 컸을 것이다. 어느 누가 사라지는 역할을 흔쾌히 하겠는가? 분명 정인교도 그리고 다른 선수들도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격 좋은 정인교가 스스로 선수단 분위기를 한번 띄우려 해도 예전 같지 않음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은 수련 선수라는 이름을 가지면서부터 예견된 슬픔이다. 그래서 그의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 위에 더 무거운 짐이 놓여 있다. 이번 시즌 정인교가 활약이 좋지 못하면 더 이상 코트에 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누가 그의 손을 잡아 끌겠는가? 정인교에게 그야말로 마지막(너무 자주 써서 그 강도가 덜 하지만 무엇이든 끝을 생각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이라는 강박이 떠나지 않고 있다.

▽‘은퇴’보다 무서운 부상 악몽

본격적인 훈련을 해야 할 10월, 정인교는 강도 높은 훈련을 못하고 있었다. 무릎 부상 때문이다. 처우 문제로 구단과 줄다리기를 시작한 지난 봄부터 다시 코리아텐더에 복귀한 8월까지 운동을 제대로 못한 탓에 몸이 많이 불었고, 팀 훈련을 시작하자 무릎에 다시 통증이 왔다. 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껏 발목을 잡아왔던 부상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 다시 한번 아찔해졌다.

00-01시즌에 정인교가 부진했던 것은 흔히 말하는 ‘팀 전술과의 부조화’라든가 ‘시즌 전에 충분히 몸을 만들지 못한 본인의 잘못’ 등의 이유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시즌이 한창이던 지난 1월에 당한 우측 내측인대 부상이었다. 그리고 기아에서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그 이전 시즌도 발목부상으로 시즌 막판에 땅을 쳤다. 이렇듯 결정적인 순간이면 부상이 늘 정인교의 발목을 잡았다.

부상 이야기를 하면서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쓴다. 그에게서 이번 시즌에 사활을 걸었다는 막연한 비장함과는 깊이가 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다시 통증이 시작된 무릎을 만져 보면서 농구인생의 끝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농구 인생을 통틀어 올해가 ‘은퇴’에 대한 고민을 제일 많이 해본 시기였테니까.

“은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처음에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더라고요.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왔나? 저는 은퇴를 많이 고려했었는데 주위에서 다른 의견을 많이 얘기해 주어서 마음을 고치게 되었지요.”

그리고 지난 봄, 시즌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동에 매달리던 이야기를 꺼낸다. 길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오랜만에 즐겁게 운동을 한 시기였다.

“지난 시즌을 망치면서 이인표 단장님과 약속한 것이 있었어요. 재계약 조건으로 목표 체중을 맞추려고 열심히 뛰었죠. 좀 이른 감이 있었지만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이 기분 좋았어요. 지금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지만요.”

00-01 시즌 종료와 함께 일찌감치 시작한 훈련은 재계약 문제로 바빠지면서 중단해야 했고, 자신을 이해해 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이인표 단장은 얼마 전 코리아텐더를 떠나고 말았다.

▽팬들의 환호를 처음으로 느낀 나래 시절

정인교는 기분 좋은 남자다. 왜 있지 않은가? 같은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아마 굵게 굵게 가는 스타일이라 그런 느낌이 드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 성격은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때도 많이 작용했다.

정인교가 대학시절(89학번) 고려대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두각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도 꽤 잘하는 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졸업할 무렵 실업농구 라이벌이었던 삼성과 현대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산업은행을 선택했다. 거기에는 당시 고려대 농구부 사령탑이었던 박한 감독(고려대 체육위 부위원장)의 조언이 큰 작용을 했다.

“계약금으로 몇 억을 받고,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갈 게 아니면 차라리 금융팀에 가라” 돈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은 정인교 마음에도 쏙 드는 조언이었고, 산업은행으로 진로를 정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기아에 트레이드 됐을 때도 섭섭한 마음을 가질 만도 했지만 별다른 트러블 없이 진행됐고, 기아에서도 적응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말하자면 정인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좋아하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열심히 생활하자’라는 식의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스타일이다.

그는 농구 외에도 재능이 많다. 농구를 시작하기 전까지 공부를 잘했고, 지금도 컴퓨터, 낚시, 볼링 손을 댄 것 중에 못하는 것이 없다. ‘농구를 하지 않고 다른 것을 했더라면 더 성공했을 것 같다’라고 말하자, “내가 해 본 것 중에 농구를 제일 못하는 것 같아요. 눈썰미가 있어서 한번 본 것은 잘 따라 하고 빨리 배우죠.”라며 한술 더 거든다.

정인교는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면 정말 놀랄 만큼 잘 해내는 스타일이다. 농구도 마찬가지다. 불현듯 그가 가장 재미있게 농구를 한 때는 언제였는지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나래에 있을 때가 재미있게 농구를 했죠. 우선 성적도 좋았고요, 원주팬들의 뜨거운 성원을 받고 코트를 누비는 기분도 최고였어요. 고려대-산업은행 시절에는 팀 성적이 나빠서 관중의 환호를 받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 시절에 농구가 재미있었죠”

▽내가 원하는 시기에 은퇴를 하겠다

인터뷰를 하면서 어두운 분위기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감추고 싶은 얘기를 들먹이는 것은 결코 좋은 효과를 낳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별 소용이 없었다. 그 스스로 “이상하게 나래에서 나온 다음부터 해마다 부상이 있었다...” 라며 농구 얘기를 꺼낸다.

그는 아마도 나래 시절을 가장 그리워 하고 있을 것이다. 정인교 플레이 한계를 표현하는 것들 ‘발이 느리다’든가, ‘공격루트가 다양하지 못하다’, ‘신장이 작아 수비 매치업에 약점이 많다’ 등의 평들도 당시에는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이 불과 3년 전이고 용병이 없었던 것도, 한국 프로농구 선수들의 신장이 특별히 작았던 것도 아니다. 잘할 때는 없었던 표현들이 부진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온다. 정인교 스스로도 그런 평가들 때문에 나래에서 기아로 옮기면서 플레이가 많이 위축됐다고 말한다.

“기아에서는 아무래도 내가 팀의 중심이 아니니까 찬스가 적었고, 나래와는 전혀 다른 플레이를 펼치는 팀이어서 적응이 힘들었어요. 자신감을 많이 잃었죠.”

지난 시즌 박수교 감독의 만류에도 코리아텐더행을 고집한 것도 자신에 맞는 팀을 찾아가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코리아텐더도 정인교와 어울리는 팀 컬러는 아니었다. 지난 시즌 내내 부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재계약 실패까지 이어졌다. 필요 없는 얘기지만 만일 기아에 남았다면 더 나은 활약을 펼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정인교는 나래 시절 자신의 플레이를 보기위해 녹화 테이프를 켜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당시에는 좀더 과감하고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는 말을 꺼낸다. 후회가 담긴 목소리다. 하지만 전성기를 구가하던 98년까지의 정인교와 지금의 그에게 달라진 것은 크지 않다. 그저 ‘그때는 정말 잘했는데 지금은...’이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자신감이다.

한번 움츠려 들면 기지개를 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더 안 좋은 것은 나쁜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는 상황이다. “이제 한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그것은 오직 농구뿐이다.”라는 본인의 말대로 농구에 전념하다 보면 그가 바라는 ‘떳떳한 은퇴’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정인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계속 여운으로 남는다.

“한 경기를 뛰더라도 정말 잘 하고 싶다. 쓸모 없어져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 계약 과정에서 생긴 ‘잘못’이었다 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시기에 은퇴를 하겠다.”라는 말이다.

최국태 기자/gen69@jumpball.co.k

(제공:http://www.jumpbal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