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 학계의 직업윤리를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계기를 마련해준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전기전자학회 산하 통신학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매거진’5월호에 실린 부산 D대 백모 교수 등 3인 공동 집필의 논문이 캐나다 빅토리아대 에릭 매닝 교수 등의 논문을 표절한 사실이 같은 학술지 11월호에서 밝혀져 국제적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 동안 국내 학계에서 표절 시비가 몇 건 공개된 일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당사자끼리의 문제로 끝났을 뿐 학계의 공론으로 논의된 적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표절하는 풍토를 뿌리뽑기 위한 공동의 노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우리 학계의 풍토가 혁신되지 않는 한 이번과 같은 국제적 망신을 또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학계 만연된 베끼기문화▼
우리 학계의 표절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흔한 사례는 국내외 학자들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의 연구 결과인 것처럼 위장하는 수법일 것이다. 이런 경우 논문은 짜깁기식으로 만들어진다. 일찍이 작가 미즈너는 자신의 저서 ‘그가 한 말’에서 “한 저자에게서 도둑질하면 표절이요, 여러 저자에게서 도용하면 연구”라고 꼬집은 바 있다.
또 제자가 쓴 논문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기도 한다. 아마도 가장 심한 사례는 외국 학자의 저서를, 그것도 자신은 손 하나 안대고 제자들을 시켜 번역한 후 자신의 저서로 출판하는 경우일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수법으로 표절하고도 학계나 대학에서 아무 일 없이 버젓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다는 현실에 있다. 그만큼 우리 학계는 표절에 둔감한 것이다.
심지어 표절시비를 제기한 사람이 오히려 이단자처럼 취급되는,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마저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따져보면 이유야 많을 것이다. 자신도 같은 처지이니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아 회피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동료를 문제삼기 어려운 풍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준수해야만 할 직업윤리의 해이에 있다고 생각된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하기 위해서보다, 좋은 직업으로서의 대학교수직을 택하는 경향이 스스로에게 학문하는 엄격한 자세를 갖추지 못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표절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학문에 대한 직업윤리가 제대로 준수될 수 있도록 표절 행위에 가차없는 제재를 가해야만 한다. 표절은 저작권 침해이니 만큼 범죄 행위에 합당한 실정법상의 처벌을 받게 해야 한다. 나아가 표절 행위를 한 자는 학계에서 매장 당하게끔 학문 공동체의 엄격한 윤리적 제재가 이루어져야 한다.
표절은 비단 학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 지식산업 전반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언론계의 경우 통신이나 다른 신문의 기사를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이 취재한 것인 양 보도하는 사례, 외국 방송의 프로그램을 표절하는 잘못된 방송 행태 등도 이에 해당한다.
▼실정법 적용 처벌해야▼
이 같은 신문과 방송의 잘못된 행위 또한 직업윤리의 해이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언론은 학계만을 매도할 일도 못된다.
표절은 밝히기가 매우 어렵기도 하다. 표절을 당한 당사자가 아니면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외국 저자의 글을 표절해 한글로 발표하거나 한국인 학자의 글을 표절해 외국어로 논문을 써서 발표하는 경우는 찾아내기가 더욱 힘들다.
특히 근래에 인터넷상에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표절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표절을 잡아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개발되지 않는 한 절망적일 만큼 사태는 심각하다.
요즘은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기가 겁난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들이 쓴 글의 표절 여부를 가려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래를 위해서라도 대학에서는 글 쓰는 사람의 윤리교육을 철저히 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교수들은 스스로 표절에서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유재천(한림대 교수·언론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