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살인마야!”
“14년 동안이나 간첩누명을 뒤집어쓰고 살면서 가정이 모두 파탄났다, 이 가증스러운 ×아!”
87년 발생한 ‘수지김 살해 은폐조작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수지 김씨의 남편 윤태식(尹泰植·43)씨에 대한 첫 공판이 열린 27일 서울지법 421호 법정. 수의를 입은 윤씨가 피고인석에 모습을 드러내자 방청석에 앉아있던 수지 김(본명 김옥분·金玉分·사망 당시 34세)씨의 가족 8, 9명이 한꺼번에 분노를 토해내면서 법정 분위기가 순식간에 고조됐다.
가족중 한 명은 “사법부가 살인마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면 지옥까지라도 대신 쫓아갈 것이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을 맡은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의 김용헌(金庸憲) 부장판사도 이들의 ‘법정 소란’을 제지하지 못했다. 아니 제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윤씨가 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도움을 받아 “북한 공작원인 아내가 나를 납치하려 했다”는 기자회견을 한 지 14년만의 일이었다.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혀 살아오는 동안 어머니는 화병으로 숨졌고 큰언니는 정신병에 걸려 이날 법정에 나오지도 못했다. 김씨의 동생들은 취직도 하지 못해 막노동판을 전전해야 했고 이혼까지 당했다.
검찰의 재수사로 윤씨의 살인 혐의와 사건 은폐조작 시도가 드러난 것이 불과 20여일 전.
윤씨는 그동안 ‘성공한 벤처기업인’으로 TV에도 출연하며 ‘명사’가 됐고 구속된 뒤에도 거물급 변호사를 여러 명 선임했다.
검찰의 신문이 시작됐다.
“87년 1월 3일 홍콩의 아파트 침실에서 여행용 가방 끈으로 부인 김씨를 목졸라 숨지게 하고 침대 밑에 시체를 숨긴 뒤 싱가포르 북한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지요?”
수사검사인 고석홍(高錫洪) 검사가 매섭게 추궁했지만 윤씨는 “변호인 신문과정에서 말하겠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시체 머리에 베갯잇을 씌운 것은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였나요?”
역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같은 시각 길 건너 서울지검에서는 지난해 경찰에 내사중단을 요청한 혐의를 받고 있는 당시 국가정보원 국장급 간부들이 소환돼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날 법원과 검찰에서 진행된 공판과 수사는 간첩사건까지도 조작 은폐해온 국가정보기관의 비인간성과 이로 인한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14년을 기다려오다 재판 시작 한 시간 전부터 법정에 나왔던 김씨의 가족들은 그러나 1시간20여분간 진행된 재판에서 윤씨로부터 속시원한 말 한마디도 듣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음공판은 12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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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간부 2명 소환▼
‘수지 김 살해 은폐조작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외사부(박영렬·朴永烈 부장검사)는 27일 경찰에 재수사 중단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국가정보원 국장 등 간부 2명을 소환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지난해 2월 경찰 수사가 중단되는 과정에 개입했으며 부하 직원을 시켜 경찰청에서 사건기록을 가져오도록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또 수사중단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경찰청 소속 간부 1명도 소환 조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26일 검찰에 출두했던 국정원 직원 2명은 “상부의 지시로 경찰에서 사건기록을 넘겨받았을 뿐 수사중단 압력을 넣은 적은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국정원에 의해 수사 의뢰된 직원들은 현재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으며 아직 직권남용 등의 혐의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