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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마르시아스 심/가장 인간적인 화합의 場

입력 | 2001-12-01 22:56:00


TV를 통해 월드컵경기 본선 조 추첨 행사의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때론 동굴 속에 숨어 있다는 오사마 빈 라덴의 입장에서도 보고, 어젯밤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한 이름 모르는 한 망자의 입장에서도 보고, 삶에 지친 슬픈 창녀의 입장에서도 본다. 월드컵에 대해 나로서도 왜 감상이 없겠는가. 나는 진정 신을 갖지 못한 시대에 살면서 고해에서 허우적대는 가여운 21세기인의 한 사람으로 이 축제를 지켜본다.

오늘날 월드컵은 인류에게 그 어떠한 신앙의 대상이나 전쟁 상황보다도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본선 조 추첨은 그 서막을 알리는 행사이며, 월드컵 경기에서 중요한 세 가지 가운데 하나다. 나머지 두 가지 축제인 개막식과 결승전은 이 행사에 이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 추첨의 결과에 따라 두 가지 행사의 양상도 달라지게 된다. 승리가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결국 축구는 승패를 가리는 경기다. 세계 모든 축구 팬들의 관심이 이 행사에 쏠린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

▼종교-전쟁도 뛰어넘는 축제▼

이번 한일월드컵은 21세기를 맞아 처음 열리는 인류의 대제전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신나는 한 마당 화합의 장인 것이다. 조폭이니 공적자금이니 세무조사니 하는 국내의 불쾌한 일로부터, 테러니 전쟁이니 이슬람이니 하는 국제적 대형 사건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사태들로 얼룩진 올 한 해의 우울하고 짜증나는 기억을 상쇄하는 유쾌함도 있다. 그 모든 긴장과 갈등을 벗어 던진 축구인과 관객들이 신명 하나로 이 앞에 모여든다. 전쟁도 아니고 산업도 아니지만 전 세계인의 이목을 불러모으는 축구라는 스포츠를 중심으로 말이다.

축구는 언어의 장벽이 없다. 문화도, 종교도, 관습도, 정치적 경제적 이질성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인간의 신체만이 이 행위를 구성한다. 축구가, 그리고 그 세계적 경기인 월드컵이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까닭은 이와 같다. 몸을 갖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든 자신이 죽지만 않는다면 한 번쯤 뛰어들고 싶은 승패의 게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경기가 스포츠이며 그 가운데에서 가장 보편적이고도 격동적인 경기가 축구다. 땅 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뛰고 달리며 목표를 성취하는 경기. 속도와 변화를 추구하는 격심한 신체 운동이면서도 용기와 결단력을 필요로 하고, 또한 개인의 능력과 함께 고도의 화합이 요구되는 이 축구라는 스포츠. 이 스포츠가 모두를 열광시키는 이유는 자명하다. 세상천지에 전쟁을 제외한다면 이만큼 격동적이고 황홀한 놀이가 어디 있겠는가. 이만한 신앙의 대상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전에 어떤 지면에서 구한말 궁내부 관리들이 외국인과 축구 경기를 가졌다는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 경기에서 보여준 우리 선비들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다. 외국인 외교관들은 그들이 직접 운동복을 입고 경기장에 나왔건만 우리 관리들은 높다란 관중석에 마련한 주연장에 좌정한 대신 머슴들을 경기장에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격차를 보이던 우리들이 그 축구 경기를 주최해 세계인들을 불러모으고,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음은 즐거운 일이다.

▼새로운 문명도래 엿볼 수도▼

조 추첨 행사만이 아니다. 내년 한일월드컵도 성황리에 열려 그 화합과 격정의 진면목을 펼쳐 보여주기를 바란다. 축구라는 스포츠가 구원의 방법은 아닐 지라도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화려하고 인간적인 화합의 방식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번 한일월드컵을 통해 인간을 위한 화합의 가능성을 마련할 지도 모른다. 나아가 미래의 인류가 선택할 새로운 신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그 신앙의 양상을 엿보게 될 지도 모른다. 새로운 신은 인간의 본질이 담겨 있는 인간의 몸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 신은 인간을 규정하는 기왕의 모든 조건을 거부하면서 인류를 그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하려 할 게 틀림없다.

우리는 새로운 세기,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지켜보는 한 이벤트로서 이번 월드컵을 지켜본다. 그 시작인 조 추첨 행사에 열광하는 우리는 어느 정도 새로운 신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마르시아스 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