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체제 붕괴 후 한 동안 잠잠했던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내년 선거정국을 앞두고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다시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계간지 ‘사상’(사회과학원)이 가을호에서 신보수주의 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데 이어, ‘역사비평’(역사비평사) ‘사회비평’(나남출판) ‘내일을 여는 역사’(신서원) 등 최근 발간된 계간지 겨울호들도 보수와 진보 또는 우파와 좌파의 문제를 특집으로 내세웠다. 또한 ‘보수혁명’(책세상), ‘진보의 미래’(동문선) 등 보수와 진보에 관한 유럽의 경험과 시각을 소개하는 단행본의 출간도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임대식 ‘역사비평’ 편집주간(서울대 강사·한국사학)은 “이념과 세력의 지형이 복잡한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을 택하는 것은 망설여지는 일”이라면서도 “‘혁명의 시대는 갔다’는 전제 아래서 진보 진영이 보수 우익에 대해 기득권 고수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합리성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강대 강정인 교수(정치학)도 ‘사상’의 가을호 특집 ‘세계화, 탈냉전 시대의 신보수주의’에서 ‘한국 보수주의의 딜레마’라는 글을 실었다.
강 교수는 이 글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보수세력은 수구세력에 불과할 뿐, 보수주의자로 자처할 자격이 없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면서 “보수 세력은 적극적인 자기 변신 노력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입장을 확고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맥락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역사비평’의 인물연구 특별기획인 ‘한국의 보수주의자’다. 필자인 연세대 국학연구원 한수영 연구교수(국문학)와 서울대 강사 김윤태씨(국문학)는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선우휘와 시인 조지훈을 한국의 건전한 보수주의자의 한 전형으로 평가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수주의자들과는 구별되는 존재”였으며 “최소한의 합리성과 소신도 결여한 권력과 인간들을 질타하는 보기 드문 지성”이었다는 것이다.
경상대 장상환 교수는 ‘사회비평’의 특집 ‘배부른 우파들의 불만’에 수록된 글 ‘계급론적 시각에서 본 좌우 대립’에서 한국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의 공존과 경쟁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좌파의 견제를 받고 있는 한국의 우파들은 우리 사회를 합리적으로 관리할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좌파의 성장과 합법적 경쟁을 보장하고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일을 여는 역사’의 특집 ‘오늘에 살아 있는 역사’에서는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 대신 냉전과 진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한국사회에서 냉전세력과 진보세력의 형성과정을 검토했다. 진보세력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보수세력이라는 단어 대신, 통일을 가로막는 세력이라는 의미에서 냉전세력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반년간지 ‘사회와 철학’(이학사)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발행될 내년 후반기호의 전체 주제를 ‘진보와 보수’로 잡고 준비 중이다.
권용혁 ‘사회와 철학’ 편집위원장(울산대 교수·철학)은 이 특집에 대해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을 한국의 상황에서 쓸 수 있는가 없는가를 학계 내에서 점검하고, 이념적 지도를 그려보자는 의도”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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