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차별적 신분구조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대체로 곱지 않다. 선비우위의 문치주의(文治主義)가 상공업을 천시하고 산업화를 저해하여 망국의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산업화를 지상과제로 생각했던 근대사회의 가치기준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사실, 왕조가 망한 최대의 원인은 산업화가 늦고 그로 인해 국방력이 뒤떨어진 까닭이다. 서양이나 일본에 견줄 만한 군함과 대포를 만들 수 있었다면 조선왕조는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종이 연호를 광무(光武)로 바꾸면서 국방과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지만 때가 너무 늦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치주의가 산업화에 소홀했다 하여 사농공상을 반대로 뒤집어 놓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사려 깊지 못하다.
▼무너지는 ‘공공의 정치’▼
왕조시대의 문치주의는 허(虛)와 실(實)의 양면이 있다. 산업화의 실패가 그 허라면, 국가의 공공성을 높여놓은 것은 그 실이다. 유교정치는 국민의 신뢰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 통치자의 사욕을 극도로 억제하고 국가를 철저하게 공물(公物)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권력구조나 인사제도, 경제구조 등을 공공화시키고 공론(公論)을 받들어 정치를 운영하려고 했다. 무서우리만큼 철저한 기록문화를 발전시켜 정치의 공개성, 투명성, 실명성(實名性)을 높인 것도 문치의 공이다.
역사상 문치의 절정기를 이룬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재가 책을 비롯한 기록문화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 기록을 통해서 왕조의 정치가 녹음기와 녹화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당시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바로 유리알처럼 투명한 문치주의가 백성의 믿음을 얻어냈고, 믿음의 정치가 519년 장수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문치로 장수하고 문치로 망한 것이 사농공상의 허와 실이라면, 그 허는 버리고 실은 취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아무리 시대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었어도 국가나 기업이나 모든 조직체가 공공성을 높이고 투명해야 한다는 원리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문치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얼마든지 산업화나 기술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세태를 보면 투명해야 될 국가나 공공집단의 경영은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국민은 마치 먼 산 구경하듯 하고 극소수의 개혁세력이 연출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에 바쁘다. 여론이라는 것도 일부 조직된 사람들의 의견만이 여론으로 비치고 조직되지 않은 다수 국민의 의견은 무시되고 있다. 그러니 국민이 정부와 지도층을 불신하게 되고 국민과 정치권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21세기가 개혁을 요구하는 시대라는 것은 분별 있는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일이다. 구조조정, 경쟁력 강화, 남북화해 모두 필요하다. 문제는 개혁주체에 대한 믿음이다. 개혁이 공공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공권(公權)이 사유화되고, 공물(公物)이 사용(私用)되는 방향으로 간다고 느끼게 되면 누가 개혁을 믿고 따르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국가의 공공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자신의 공 잊어버려야▼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국가의 공공성이 전보다 높아지고, 국정은 더욱 투명해지고, 적재적소의 인사정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민주화 10년의 결산은 실망스러운 점이 많다. 왜 그런가.
역사적으로 보면 공신이 많은 시대가 가장 혼란스럽다. 공신들의 자만심과 독선이 국가의 공공성을 해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신을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공신정권의 최대의 과제가 된다. 폭군 연산군을 내몰고 중종을 세운 반정공신(反正功臣)보다도 공신과 싸우다 죽은 조광조(趙光祖)가 숭앙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복 후 우리나라는 어쩌면 공신정권의 연속이었다. 건국공신, 혁명공신, 그리고 민주화공신들이 차례로 정권을 담당했다.
그 공신들이 자신의 공을 잊어버리고 진정한 공공국가를 세우려 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뿌리깊은 정치불신은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영우(서울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