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 유명 작가가 십 년 전에 평역한 ‘삼국지’가 1400만부 이상 팔리면서 초(超)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뒤 국내 유수의 소설가들이 ‘삼국지’ 번역 경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모두 알만한 유명작가들이 창작에 쏟아야 할 시간과 노력을 ‘삼국지’ 번역에 쓰겠다는 데는 각기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지 곰곰 생각해 볼일이다.
‘삼국지’는 전쟁소설일 뿐 고전이 아니다. ‘삼국지’의 원본 격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중국 한나라 말 천하가 위, 촉, 오의 삼국으로 분열되어 패권을 다투던 투쟁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그 내용은 온갖 권모술수와 중상모략도 서슴지 않는 약육강식의 묘사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삼국지’나 ‘손자병법’ 등이 필독서처럼 되어 있는 현실은 우리 시대가 전쟁의 시대임을 실감나게 한다.
▼‘전쟁의 시대’ 실감▼
천하가 무수한 소국으로 분열돼 싸움을 일삼던 춘추전국시대는 그야말로 천하대란이었다. 합종책을 설파하던 소진이나 연횡책을 논하던 장의 등 세객(說客)들이야말로 당대의 주역들이었다. 그들의 치열한 두뇌싸움과 모사로서의 역할은 오늘날 미국의 키신저보다 한 수 위로 보인다.
또 하나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인지 ‘삼국지’를 수 없이 읽다가 그 이본(異本)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삼국지’를 사 모은 것이 지하실 서고에 가득하다고 자랑하는 이도 있다. ‘삼국지’를 많이 읽을수록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내는 방법을 잘 터득하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사는 지혜와는 거리가 있다.
18세기 말 정조대왕은 ‘삼국지’ ‘수호전’ 등의 소설류를 패관소품(稗官小品)이라 하여 금기시하였다. 문체를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인심을 어지럽히고 사회기강을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문체를 순정하게 되돌림)정책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평화와 안정을 최고 가치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기본성격상 삼국지 같은 소설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정조의 선왕인 영조 대에는 조선사회에 한 세기 이상 평화가 지속되면서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소대풍요(昭代風謠)’가 나왔다. 위항(委巷·달동네)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공동시집인 이 책은 당대를 소대(昭代), 즉 태평성대로 생각하고 자신들이 펴낸 시 모음집의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현대의 계급사관적 입장에서 보면 신분사회의 한계인으로 앙앙불락 했음직한 이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던 시대를 ‘소대’로 불렀음은 재미있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지 1세기 만에 이룩한 평화와 안정이 이들에게 이런 인식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풍요가 달동네에도 들려오는 ‘소대’가 올 것인가.
▼태평성대 희망을 찾아서▼
19세기 이래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시대에 경쟁과 투쟁의 이념에 오염되어 살아온 우리들에게 ‘소대’란 요원한 꿈만 같아 보인다.
그래도 희망을 품어본다. 미국이 더 이상 독 안에 든 쥐를 몰아대지 말고 자신감과 관용을 보여 주기를 기대해본다. 지난 세월 동서냉전구도에서는 곧잘 가난한 나라에 식량을 지원하고 독재국가의 인권문제에도 해결사로 나서면서 서반구의 대형노릇을 톡톡히 해낸 미국이다. 구 소련이 몰락한 후 견제와 균형이 사라졌다면 홀로 남은 미국의 책임은 더욱 막중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일방적인 미국 편들기를 자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은 6·25전쟁 때 우리를 돕고 원조해 준 미국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리론도 미국이 참다운 세계 주도국의 역할을 할 때에만 유효한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전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앞당기는 일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기에 따라서는 약소국도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정옥자(서울대 교수·한국사·규장각관장·본보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