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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서병훈/버리십시오! 그 物慾

입력 | 2001-12-11 18:23:00


지난 주말 축구 국가대표팀이 미국과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스포츠이기는 하나, 그래도 우리가 미국을 이겼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야말로 유일 강대국 아닌가. 그런 미국을 맞아 우리 선수들은 잘 싸웠다. 특히 젊은 선수들이 정신력에서 상대방을 압도하는 것 같아 흐뭇하다 못해 기특하기조차 했다. 미국 ‘앞에만 서면 왠지 작아지기만 하는’ 기성세대와는 확실히 다르다. 역시 미래는 젊음의 몫인 모양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1980년대 초반, 한국은 그렇고 그런 가난한 나라에 불과했다. 한국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우리는 행여 미국 사람들 눈에 띌까 몰래 숨어 김치를 먹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존심 상할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주눅 든 한국인, 그것이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가질수록 공허해지는 삶▼

그러다 한국 자동차 ‘엑셀’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속도로에서, 그리고 주차장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그 소형차를 보며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현대자동차로부터 쓴 커피 한잔 얻어먹은 적 없었지만, 그냥 좋았다. 피는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했다. 신문은 한국 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불티나듯’ 팔린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정치가 엉망이라고 다들 불만이지만, 적어도 군인이 다시 민주주의를 유린할까 걱정할 일은 없어졌다. 새로 문을 연 인천국제공항을 보라. 이 정도면 세계 어느 공항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중국이 2008년 올림픽을 유치했다고 축제분위기라는데,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경험한 사건이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축구도 좋고, 경제도 좋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총체적인 삶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아니 굳이 다른 나라와 비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들의 사는 모습에 대해 만족할 수 있는가.

낡은 필름을 통해 우리의 지나간 삶을 되돌아볼 때가 종종 있다. ‘아, 그때는 저런 움막집 같은 데서 살았구나! 아이고, 저 연탄 가스’ 등등.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TV를 바라보노라면, 과거와 대비되는 이 현실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시인 김광규의 생각은 다르다. 그때는 걸어다녀도 행복했다. 지금은 차를 타고 다녀도 불만스럽기만 하다.

‘걸어서 다녔다/통인동 집을 떠나…동숭동 캠퍼스까지/전차나 버스를 타지 않고…먼지나 흙탕물이 튀는 길을/천천히 걸어서 다녔다/요즘처럼 자동차로 달려가면서도/경적을 울려대고/한 발짝 앞서 가려고/안달하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정신 없이 달려왔다. 미국을 바라보고, ‘가까운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그 덕에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아이들 과외도 시킬 형편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김치를 숨어서 먹을 필요도 없어졌다. 이만하면 성공한 것이다.

▼인간답게 사는 연습부터▼

그런데도 우리는 불안하다. 까닭 모르게 공허하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우리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천박해지고 있다. 외형이 번듯해지는 것에 반비례해서 우리는 더욱 작아지는 듯하다. 보신탕 문화를 욕한다고 발끈하면서 보졸레 누보라는 정체불명의 외제 포도주에 넋을 잃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턱없는 자신감과 깊이 모를 열등감 사이를 방황하는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물질로 승부를 가름하자면 그 끝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구약(舊約)의 선지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루소는 인간의 헛된 욕심 때문에 ‘덕 없는 명예, 지혜 없는 이성, 행복 없는 쾌락’만이 넘쳐나게 되었다고 절망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그 어렵던 시절에도 우리나라가 문화국가가 되기를 염원했다.

이제는 숨을 고르고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가 되었다. 우선 인간답게 사는 연습부터 하자. 내가 나의 중심을 잡고, 삶의 본질에 대해 겸손하게 성찰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1등 국가가 아니겠는가.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인 것이다.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