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기획 포인트와 마케팅 컨셉트, 그리고 타깃 포인트나 장르까지 단숨에 보여주는 제목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처럼 ‘잘 지은 영화 제목은 절반을 잡고 들어간다’는 명제로 영화 제목 이야기를 해본다.
많은 영화인들은 좋은 제목으로 ‘마누라 죽이기’를 꼽는다. 분명한 컨셉트와 코미디라는 장르를 결합,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를 보여준 제목이었다. 제목이 이미 컨셉트를 말해준 탓에 막상 신문광고 카피는 “예매만이 살길이다!”였다. 버금가는 코미디 제목으로는 바로 ‘주유소 습격사건’. 이른바 뭘 물어보면 촌스러운 시대의 대표 코미디가 된 이 영화를 습격이니 사건이라는 말 때문에 액션이라고 말하는 자는 적어도 없었다.
▼제목에서 컨셉트의 향기가!
과거 ‘매춘’ ‘애마부인’ 등 에로 영화의 제목들이 관객을 낯뜨겁게 만들던 시절, 이장호 감독의 ‘무릎과 무릎 사이’는 무릎을 치게 했던 제목이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는 뭐가 있지’라는 물음이 유행했는데 답은 썰렁하게도 ‘과’였다.
1980년대에는 제목에 풍자를 씌워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이 많았고 ‘꼬방동네 사람들’ ‘고래사냥’ ‘어둠의 자식들’ ‘겨울나그네’ 등 원작 소설의 영화화는 복잡했던 그 시대를 소설처럼 소비하게 하는 유행을 낳았다.
▼제목은 흥행순이 맞잖아요?
89년, 한 여고생의 충격적 자살과 유서의 내용을 제목으로 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진짜 진짜 좋아해’ ‘얄개시대’로 맥이 끊겼던 청소년 영화의 붐을 다시 일으켰던 중요한 영화가 됐다. 이후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열일곱살의 쿠데타’ 등의 제목들이 나왔지만 ‘행복은 …’을 뛰어넘는 제목이나 내용은 없었다.
그후로 잠잠했던 청소년 영화가 ‘여고괴담’, ‘화산고’로 등장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해준다.
트렌디 영화로 자리매김된 ‘결혼 이야기’는 시대를 넘나들며 늘 좋은 제목의 예로 든다. 다소 밋밋하다는 우려가 있었음에도 담담하게 ‘이야기’라는 단어에 신혼부부나 젊은 남녀의 사랑을 풀어내 로맨틱 코미디의 역사를 다시 썼다.
▼소재의 다양화, 제목도 가지가지
영화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프랑스 소설을 옮겨온 ‘처녀들의 저녁식사’나 ‘8월의 크리스마스’는 낭만과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제목으로 꼽힌다.
사연을 무시하고 들을수록 좋아졌던 제목은 ‘은행나무 침대’ ‘쉬리’이고, ‘공동경비구역 JSA’나 ‘간첩 리철진’은 직설 화법의 제목들이다.
불교적 색채를 띤 영화 ‘만다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등이 제목부터 고민을 안겨주었던 것에 비해 이제는 ‘달마야 놀자’라는 다소 불경스러운 제목이 무리없이 관객과 만나는 현상을 보면 이제 영화는 느끼는 것에서 즐기는 것으로 옮겨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에 흥행의 향기를 귀신처럼 맡은 비디오 회사들은 한국 영화 흥행의 최고 기록을 경신한 ‘친구’를 ‘침구’, ‘공동경비구역 JSA’는 ‘공동섹스구역’, ‘쉬리’는 ‘하리’ 등 기발한 에로 제목으로 바꿔 흥행의 파도를 탔다.
그들도 나름대로 흥행의 잣대를 가지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좋은 제목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제목만 좋다고 다 잘되는 건 물론 아니다. 더구나 흥행의 결과 때문에 나빴던 제목으로 둔갑을 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라는 시적인 제목이 그런 억울한 누명을 쓴 대표 케이스였다.
제목만 좋다고 다 잘되는 건 물론 아니다. 더구나 흥행의 결과 때문에 나빴던 제목으로 치부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라는 시적인 제목이 그런 억울한 누명의 대표 케이스였다.
좋은 기획과 합리적인 제작, 안정된 마케팅을 거치면서 성공한 영화로 만들어 내기까지 영화인들은 ‘나 죽었소’ 싶은 마음으로 달리는 마라톤 선수가 된다. 그 긴 릴레이에 지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리기 위해 시작이 반인 제목짓기는 그래서 너무나 중요하다.
정승혜 (씨네월드 이사)amsaja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