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토로 만든 동글동글한 아저씨와 귀여운 강아지. 4년 전 우리 극장가에 선보인 영국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은 ‘애니메이션’ 하면 일본의 제패니메이션과 미국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만 떠올리던 관객들에게 색다른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림이 아닌 인형을 움직여 만든 이런 애니메이션을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라 한다. 진흙 소재가 가진 유연한 질감과 물리적 실재감이 살아 있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섬세한 수작업을 통해 완성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움직임을 위해 손가락을 핀으로 밀며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찍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작업, 컴퓨터가 모든 동작을 만들어주는 3D 애니메이션이 번성하는 요즘 24분의 1초짜리 필름 한 장마다 일일이 물체를 손으로 움직여 찍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한다는 것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처럼 보인다.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클레이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예외 없이 ‘월레스와 그로밋’시리즈와 ‘치킨 런’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들 작품이 태어난 곳이 바로 영국의 아드만 스튜디오. 25년 역사를 지닌 이 회사는 앞의 작품들 외에도 수많은 단편과 TV시리즈, 광고 등을 제작하며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왕국으로 성장했다.
영국문화원과 서울애니메이션 센터가 공동으로 마련한 올해 ‘영국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아드만 특별전’으로 꾸며졌다. 작년에 열렸던 제1회 영국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영국 애니메이션의 특이한 감성과 저력을 두루 펼쳐 보인 자리였다면, 올해는 아드만의 작품들을 통해 클레이 애니메이션만의 매력과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
▼점토인형 따스한 체온 듬뿍
행사는 12월21일부터 한 달간 애니메이션센터에서 열린다. 아드만 스튜디오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대표작까지 총 30점의 작품이 상영되고, 영화제작을 위해 점토를 빚어 만든 모형과 세트를 함께 전시해 제작과정도 엿볼 수 있다. 행사기간 동안 ‘월레스와 그로밋’의 사랑스런 등장인물들을 본뜬 캐릭터 상품 전시회도 함께 열릴 예정이어서 연말 가족 나들이에 어울리는 흥미진진한 자리가 될 듯.
행사는 모두 무료로 진행된다. 애니메이션센터의 권용주씨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광고, 뮤직비디오까지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치킨 런’에 나왔던 2m가 넘는 치킨파이 기계 등을 직접 보면서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정교함과 스태프들의 장인정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드만의 작품들은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잠재력을 극치로 끌어올려 다른 장르의 애니메이션이 결코 따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선사한다. 관객들은 처음엔 흙으로 빚은 인형이 스크린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신기함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첨단의 기술력으로도 만들어내기 힘든 따스한 체온과 뛰어난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월레스…’시리즈에서도 볼 수 있듯, 예민한 현실 관찰과 삶에 대한 성숙한 접근, 총기 넘치는 유머는 아드만 애니메이션의 특징이다. 이들 작품은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영토가 무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계원조형예술대 애니메이션학과 김흥중 교수)
부뚜막의 온기와 쿠키 굽는 향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세계. 첨단 테크놀로지에 물린 사람들은 어딘지 어수룩한 점토인형을 보면서 따스한 체온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신을진 주간동아기자 > happyend@donga.com
주요 상영작 가이드
꼬마 렉스-부엌 안의 쥐편
렉스는 집에 와서 부엌에 쥐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쥐는 끔찍하게 힘이 세고, 절대 집에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동물원 인터뷰
‘립 싱크’ 시리즈의 한 작품. 영국 동물원에서 동물들과의 인터뷰를 다룬 애니메이션.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들이 자신들이 살던 곳과는 다른 영국 생활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프-마법의 문
아드만 스튜디오의 초기작. 76년 BBC를 통해 방영된 어린이물로 단순한 형태와 친근한 겉모습, 따뜻한 색감으로 순식간에 텔레비전의 스타가 되었다. 80년대에는 BBC의 저녁 뉴스시간 바로 전인 프라임타임에 방영되기도 했다.
앵그리 키드-감자칩/골키퍼/헤드라이트
젊은 세대의 엽기 취향을 반영한 작품. 주인공 앵그리 키드는 기괴하게 뻗은 붉은 머리, 툭 튀어나온 눈, 심술궂은 입 등 어디 하나 정 붙일 만한 구석이 없다. 작품 전반에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냉소적 분위기가 흐르고 있으며 뚜렷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영국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월레스와 그로밋-화려한 외출/ 전자바지 소동/ 양털도둑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아드만의 대표작. 어느 한적한 마을에 살면서 치즈 얹은 크래커에 차 한잔을 즐기는 것이 최대 기쁨인 월레스씨는 유리창닦이가 공식 직업이지만 탁월한 발명가이기도 하다. 그의 애견 그로밋은 주인보다 어른스럽고 바흐를 듣고 전자공학서를 읽을 정도로 지적이며, 천진난만한 주인 곁에서 온갖 뒤치다꺼리를 도맡는다.
피브와 포브
피브와 포브의 악의 없는 농담이 점차 엽기적으로 변해간다. 고전 어린이 프로그램을 재치 있게 본딴 애니메이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