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옥연 '타월을 든 여인'
사랑이 거기 있었다. 25년의 시간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내 곁을 떠났으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시간도 점령하지 못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앞에 홀연 등장했던 그녀, ‘릴리안’. 우수마저 신비롭던, 투명한 슬픔을 눈에 담은 청초하고 이국적인 소녀. 고등학생은, 청회색이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에 그저 매료됐다. 사춘기의 정신적 허기를 아직도 감당할 수 없을 때, 권옥연의 ‘릴리안’은 그렇게 나의 혼을 앗아갔다. 그녀를 소유할 수 없어서 가슴이 아팠던 나는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정호승의 ‘내가 사랑한 사람’ 중에서)하며 불가능한 사랑에 오히려 침몰하기를 즐겼던 시절이었다. 퇴폐적 사랑, 그리움으로 병드는 영혼이 오히려 아름답던 시절. 은은한 청회색을 배경으로 우수에 젖은 권옥연의 여성은 잔인한 매력으로 나를 혼절시켰다.
단순하고 간결한 구도와 평면성 그리고 청회색, 녹회색이 형성하는 깊은 슬픔이 치기어린 감상벽에 불을 지폈던 것이다. 권옥연의 ‘릴리안’에게서 ‘첫사랑은 유일한 연애’라고 했던 괴테의 말을 그때 떠올렸던 것 같다. 이후 권옥연은 내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후 첫사랑 ‘릴리안’은 ‘여인’,‘손모은 여인’, ‘타월을 든 여인’ 등으로 변주되어 첫사랑의 애잔한 기억을 지속시켰다.
권옥연, 그가 국립현대미술관에 의해 ‘2001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이번 전시는 195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의 작품을 엄선하여 조형세계의 전개와 그 추이를 점검하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준다.
권옥연은 서양과 동양, 구상과 추상을 서정적이고 시적인 구성과 색채로 구현하여 독특한 아름다운 세계를 연출하는데 탁월하다. 그의 그림에선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슬픔마저 감지할 수 있는데, 이는 잃어버린 신화적 세계와 순수한 마음에 대한 집착으로 읽혀진다.
최근엔 테라코타를 재료로 입체작업에 몰두 중이다. 이 역시 추상과 구상을 절묘하게 조화하려는 독특한 시도로 파악된다. 회화와 음악, 입체와 평면, 현실과 환상이 자아내는 절묘한 매력을 이번 기회에 감상하는 것은 어떨까. 관람 중에 잃어버린 내 마음이 거기 있다는 기쁨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조용훈 (청주교대 교수·국문학)
▼전시안내
-2002년 1월20일까지(월요일 휴관)
-서울 덕수궁 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700원
-02-779-53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