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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자본의 최면에서 깨어나라 '프리바토피아를…'

입력 | 2001-12-28 18:00:00


◇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이냐시오 라모네 외 지음 최연구 옮김/

271쪽 1만5000원 백의

프랑스의 세계적 권위지인 르 몽드의 자매 월간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전세계적으로 120만부 발행)는 지난 세기에 대한 진단과 아울러 21세기를 전망하며 대안을 제시해 왔다. 중도 좌파적 일간지인 르 몽드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이 국제정치 전문 월간지(1954년 창간)는 드물게 반 신자유주의, 반 패권주의를 표방함으로써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랍권 좌파 지식인 진영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디플로마티크’의 특징은 추상적 이론이나 아카데미즘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격조 높은 비판적 담론 구성력으로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좌파적 시각의 정공법으로 돌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다루는 주제들은 앵글로 색슨 문화중심으로 진행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환경과 노동, 교육과 정보 미디어, 인권과 사회복지, 생명공학과 정보기술(IT) 테크놀로지 등 현대문명이 제기하는 다양한 문제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이 책은 ‘디플로마티크’의 ‘보는 방식’이란 시리즈 중 ‘21세기를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것이다. 이 책의 화두는 ‘프리바토피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사유화(private)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인 ‘프리바토피아(privatopia)’는 20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주류 이데올로기인 세계화(또는 전지구화) 현상의 핵심 개념이다. 그렇다면 ‘프리바토피아’와 세계화 이데올로기가 왜 문제인가? 필자들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연대의식과 공공성의 파괴, 시장에 의한 노동의 착취, 그리고 시민의식의 희석과 민주주의의 쇠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필자 중 한 사람인 피에르 부르디외는 수학적 허구와 거대한 추상화를 거친 신자유주의란 모종의 판타스틱한 ‘유령’이며 도덕적 다윈주의를 잉태한다고 주장한다.

삶의 전방위적 시장화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세계는 점점 더 ‘반(反)교양적’이고 ‘문화파괴적’인 하이퍼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장악되고, 문화적 디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시장의 무한한 확장과 극단적인 사유화는 하이퍼 부르주아 계급의 출현과 함께 세계적 차원의 맥도널드화 현상을 초래한다. 가령, 맥월드에서 사람들은 정치적 자율성을 상실하고 순응주의에 물든 ‘퓌톤’(자신이 삼킨 것과 유사한 모양과 색깔로 변하는 그리스 신화의 동물)과 같은 존재로 변화한다. 이미지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길들여진 사람들이 사는 맥월드는 시적 은유가 사라지고 이윤의 최적화와 판옵티콘(원형감옥) 속과 같은 안전만이 보장되는 공간일 뿐이다.

시민적 자율성과 공공이익을 보장하지 못하는 시장은 인간을 소비의 주체와 대상으로만 파악하고 사회를 ‘자기먹기’의 장으로 탈바꿈시킨다. 드니 뒤클로는 돈과 재화의 일렁임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이 와해되면서, 동시에 후기자본주의의 증후군인 ‘자기먹기’와 거대 편집증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자기먹기’ 현상은 후기 자본주의의 존재론적 특성으로 이미 인간 자체가 자원(재)활용의 순환구도 속에 편입되어 다른 자원처럼 소비 대상화된다는 현상을 말한다.

펠릭스 가타리는 텔레비전 앞에서 최면상태에 있는 시청자의 모습이 바로 이성을 상실하고 타인으로부터 고립돼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라고 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현대인은 생태철학(환경, 정신, 사회 생태학)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생태철학의 지형에서 재구성되는 새로운 사회는 수직적 위계가 아닌 다중심적 사회, 미시 파시즘이나 포드주의가 소멸하고 특수성이 인정되는 다원적 사회이며, 생태적 책임의식과 기계적인 창조력이 발휘되는 사회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디플로마티크’의 대표적 논객인 베르나르 카생은 공허한 이론의 구축이나 화려한 레토릭 대신 ‘시민 우선의 십계명’을 제시한다.

우선 구시대의 언어와 분석틀로서는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없으므로 ‘인간개발지수’와 같은 신 개념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인간이나 자연 환경에 해가 되는 것은 마이너스 지수로, 그 반대의 것은 플러스로 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민, 즉 스스로 통치할 수 있고 또 통치당할 수 있는 자율적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시장 저널리즘이나 서구 패권주의에만 봉사하는 미디어 권력으로부터 정보와 교육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 개개인이 삶의 존재 의미를 음미하고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수입이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카지노 자본주의가 융성하고 거대 금융자본의 투기가 성행하는 한 저개발 국가들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한, 보편적 차원의 시민 사회가 건강성을 되찾을 수 없다. 따라서 금융 투기자본은 분쇄되어야 하고 보다 평등한 다자간 무역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 카생씨는 시민들이 21세기를 위한 진정한 문명 프로그램을 제시하려면 사회 및 환경조항을 신설 강화하고 지구적 차원의 공공영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결론짓는다.

최근 세계화의 물결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구호 속에서 살았던 우리에게 ‘디플로마티크’ 지식인들의 글은 한해를 정리하면서 차분히 되돌아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 ‘폭력의 세기’와의 확연한 결별을 염원하는 인류의 소망과는 달리 새 천년의 첫 장도 전대미문의 테러와 폭력으로 물들었다. 9·11 미국 테러 사건 이후 이슬람 세계의 과격한 ‘빈 라덴화’와 미국의 과잉된 힘의 독주는 또다시 인류 진보의 시계를 계몽 이전으로 되돌려 놓을 듯한 기세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여전히 희망과 비전의 시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디스토피아적 ‘지옥의 묵시록’이 구현될 것인가? 현대문명의 현안들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며 단호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자유는 행동이라고 하였고, 투키디데스는 “그냥 쉴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울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물론 ‘디플로마티크’가 유럽의 진보적인 좌파 지식인 진영의 목소리를 매우 강하게 담고 있고 다분히 유럽 중심적인 사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설정하는 의제들이 보수와 진보, 좌우의 이념적 이분법을 뛰어넘는 보편적 차원의 질문들이고, 이는 우리 사회가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21세기에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과제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김동윤(건국대교수·불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