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또 저문다. 스포츠스타들은 올 한해도 숱한 영광과 좌절이 엇갈렸다. 물론 영광은 영광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새해’가 있기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홍명보, 김병현, 김미현…. 이들은 올 한해 아무래도 영광보다는 아쉬움이 컸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은꼴이다. 세밑을 맞는 이들의 감회는 아무래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들의 올 한해 회고와 새해를 맞는 각오는 뭘까.》
▼홍명보: 부상-후배들 도전에 휘청 "중앙수비수로 마지막 불꽃"
97년 일본으로 떠난 후 4년반 만에 고국팀 포항 스틸러스로 되돌아온 홍명보(32).
26일 귀국 직후 가진 전화 통화에서 그는 “부상으로 그간 뛸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선수가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라며 최근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축구대표팀 중앙 수비수 세대교체 논란에 대한 심경을 우회적으로 말했다.
“제가 내년 월드컵에 못 나간다 하더라도 10여년간 대표팀에 공헌했던 게 물거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못 하는 건 못하는 것이고 이제까지 한 것은 정확히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홍명보의 음성엔 짙은 아쉬움이 절절히 묻어났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 국제 경기에 데뷔한 것은 90년 1월 몰타에서 열린 4개국친선축구대회 노르웨이전. 이후 그는 만 12년간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로 명성을 떨치며 한국 축구대표팀을 이끌어왔다.
축구 선수로서는 ‘황혼기’라 할 30대를 넘기고도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첫 시련이 찾아온 것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와일드카드로 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었지만 오른쪽 장딴지 부상에 덜미를 잡혀 벤치를 지켜야 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올 들어서도 그는 변함 없는 한국의 수비 사령탑이었다. 하지만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 때부터 송종국 유상철 등 스피드와 체력을 앞세운 후배들의 강력한 도전에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8월 오른쪽 정강이뼈 피로골절로 치명타를 입었다.
그가 없이도 한국 수비가 안정되자 이제 그를 미드필더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미드필더는 해 본 포지션이 아니라 아무래도 어색해요.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중앙 수비수로서 최선을 다해 볼 생각입니다.”
그는 최근 미국 병원에서 훈련을 재개해도 된다는 판정을 받았고 몸 만들기에 나섰다. 내년 월드컵 무대에서도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bae2150@donga.com
▼김미현: 정상문턱서 잇달아 쓴잔 "미련털고 내년엔 꼭 우승"
앙증맞은 김미현(24·KTF)은 귀여운 미소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평소 인상 한번 쓰는 일이 없었지만 그때만큼은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7월 캐시아일랜드챔피언십에서 플레이오프 끝에 로지 존스(미국)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문 뒤 울음을 터뜨린 것. 4월 오피스디포에서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에게 연장전에서 무릎을 꿇은 데 이어 또 우승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복받치는 슬픔을 누를 수 없었단다.
“우승에 대한 부담과 조급증이 생기다보니 고비를 넘기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김미현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8월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도 선두를 달리다 막판 박세리에게 역전을 허용해 우승 트로피를 내줬다. 준우승만 3차례한 김미현은 미국 진출 3시즌 만에 처음으로 우승컵을 안아보지 못한 채 시즌을 접어야 했다. 게다가 잠시 짬을 내 출전한 국내대회에서도 우승을 못해 96년 프로데뷔 후 첫 무관의 해를 맛봤다. 혈관이 약한 탓에 자주 터진 코피와 잔병치레까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스포츠 세계는 늘 1등만이 기억에 남잖아요.”
13차례 ‘톱10’에 드는 꾸준한 성적으로 상금랭킹 8위에 올랐는데도 정작 우승이 없어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기만 했다. 지는 해와 함께 아픈 기억까지 묻고 싶다는 김미현은 28일 재도약을 다짐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내년 시즌은 예년과 달리 2월 말에 시작돼 그 어느 때보다도 충실한 동계훈련을 소화할 수 있다. 쇼트게임과 퍼팅 위주로 샷을 가다듬을 계획이며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마인드컨트롤도 배울 생각.
“아쉬움 속에서도 미국 무대에 거의 적응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미련은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래요.” 유달리 밝게 들리는 김미현의 목소리에서 쓰라린 상처는 어느새 말끔해진 듯싶었다.
kjs0123@donga.com
▼김병현: 지옥과 천당 오간 한 해 "언히터블 BK 자신합니다"
팬들은 아직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11월2일 뉴욕 양키스타디움에서 9회말 김병현(22·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 2사후 스콧 브로셔스에게 2점짜리 동점홈런을 맞은 뒤 마운드에 쪼그려 앉았던 모습을…. ‘운명의 장난’이라 할 만한 이틀 연속 9회말 2사후 동점홈런 허용. 김병현은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외신들은 그 순간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하늘은 애리조나에 4승3패의 역전우승을 안겨주며 김병현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줬다. 첫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끼게 된 동양인. 올 한해 김병현 만큼 ‘지옥과 천당’을 오가며 극적인 영욕을 함께 맛본 사람이 있을까. 때문에 김병현은 잊지 못할 2001년이 가는 게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론 후련하기도 하다.
“정말 많은 일이 내게 일어났죠. 기쁜 일도 있었고 슬픈 일도 있었습니다. 또 기분 나빴던 일, 즐거웠던 일도 기억이 나네요. 내 야구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한해였습니다.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2001시즌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앞으로 더욱 노력해서 팬들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어요.”
월드시리즈 기간 중 가장 팬들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선수가 된 김병현은 이제 내년시즌 투구 하나 하나가 관심의 대상이 될 게 분명하다. 월드시리즈가 끝난 뒤 갑자기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이 버겁겠지만 그 부담을 훌훌 털어 내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이제 팬들은 충격적인 홈런을 맞은 뒤 사라져 간 메이저리그의 다른 투수들과 달리 김병현이 보란 듯이 타자들을 멋진 삼진으로 잡아내며 진정한 스타로 발돋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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