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2002 어젠다로 ‘페어 플레이(fair play)’를 선정, 새해 소망을 담았다. 월드컵 축구대회와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에서의 페어 플레이를 기대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위험 수위에 도달한 우리 사회의 상호불신과 편견, 갈등과 반목, 대결과 증오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페어 플레이 문화의 정착이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룰에 따른 경쟁과 승복, 그리고 공존과 상생을 지향하는 페어 플레이 문화가 뿌리내리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균열이 갈수록 심화됨으로써 재도약을 위한 국민적 에너지의 결집이 요원하다는 각성에 바탕한 것이었다.
▼글 싣는 순서▼
- ①공정한 정치 누가 막나
- ②여야의 주문과 다짐
- ③경제 바로세우려면
- ④불공정 사회풍토
이 같은 취지에서 동아일보는 신년특집으로 우리 사회의 ‘언페어 플레이(unfair play)’를 진단하고 페어 플레이를 위한 대안과 제언을 담은 시리즈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출발점으로 정치를 택했다. 국민들이 정치인을 가장 불공정한 집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신년여론조사 결과처럼 우리 사회의 페어 플레이 문화를 근본부터 좀먹고 병들게 한 것이 바로 정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전문가들 “유권자가 페어플레이 심판을”
- “원칙 지키면 불이익” 60%
“오랜 관행이라 일거에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작년 말 동아일보가 여야 의원들의 ‘예산안 나눠먹기’ 실태를 집중 보도하자 김충조(金忠兆)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거 참” 하는 소리만 연발했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부터 ‘페어 플레이’는 실종 상태다. 오히려 강행처리, 실력저지, 변칙통과, 표결불참, 방탄국회 그리고 막후 야합과 밀실 담합 등 각종 ‘언페어 플레이’가 상례화돼 있는 곳이 바로 국회다.
의원들의 지역구 민원성 사업을 위한 예산 갈라먹기는 새해 예산안 심사 때만 되면 되풀이되는 언페어 플레이의 전형. 국민 혈세를 ‘새치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년 예결위 계수조정과정에서도 증액된 164건(1조3959억원)의 사업 중 84건(6132억원)이 상임위 예비심사 과정에서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이었다. 의원들의 ‘쪽지’를 통해 슬그머니 새치기해 들어온 것들이었다.
중앙대 장훈(張勳) 교수는 “국회는 입법을 통해 우리 사회의 룰을 만드는 곳인데 입법과정 자체가 변칙과 반칙에 물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鄭惠信) 박사는 “국회의원들의 그런 행태를 보면서 국민들은 ‘선량이라는 사람들도 그러는데…’라는 식으로 언페어 플레이에 대한 자기모순과 죄책감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이만섭(李萬燮) 국회의장은 한마디로 “이 모든 것이 여야가 국회를 대권싸움의 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의 룰이 지배하는 대권 싸움이 페어 플레이를 질식시키고 있다는 얘기였다.
승자독식의 룰은 제왕적 권력문화의 소산이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여러 차례의 여야 영수회담이 있었지만, 회담은 대부분 안한 것만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토론이나 협의는 없고 서로 주장과 요구만 늘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회담’은 하지 않고 서로를 제압하기 위한 ‘기싸움’만 벌인 셈이었다.
선거 때만 되면 도지는 우리 정치의 고질병 중 하나인 ‘○○○ 죽이기’도 이기고 지는 것만이 절대 가치를 지닌 제왕적 권력문화 속에서 배태돼 왔다. 상대방을 죽여야 자기가 산다는 식의 ‘○○○ 죽이기’는 공존과 공생의 페어 플레이를 싹부터 잘라내는 황폐한 정치문화의 극단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1인 보스 정치, 측근 정치, 패거리 정치도 제왕적 권력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작년 11월 여야 의원 155명이 뜻을 모아 사형폐지에 관한 특별법을 제출했을 당시,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재가 “세상 섭리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외치고 있다”고 한마디하자 법안에 서명했던 자민련 의원들이 일제히 꼬리를 내렸다. 보스 한 사람의 일갈에 선량들의 소신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특히 정치판의 패거리는 언페어 플레이에 대한 묵시적 동의와 그 과실에 대한 내밀한 기대로 뭉친 끼리끼리 모임으로,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행동양식을 갖고 있다. 민주당의 김근태(金槿泰) 상임고문이 작년 당내 정풍운동 때 동교동계를 군부정권 시절 육사 출신들로 이뤄진 군내 ‘하나회’에 비유한 것도 같은 취지였다.
패거리 정치는 정치 신인들의 진입을 막아, 우리 정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총선 전국구 공천 때마다 끊이지 않는 ‘돈 공천’ 잡음도 그로 인한 퇴행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훈(朴正勳) 전 민주당 의원의 부인이 최근 “남편이 14대 총선 전국구 공천헌금으로 23억원을 냈다”고 밝힌 것은 패거리 진입장벽을 뚫기 위해 금권정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현실에 대한 고발이었다.
또한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부총재가 작년 12월 대선후보 경선출마 선언을 했다가 돌연 “출마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배수진을 친 배경도 집단적 배타주의와 무관치 않다는 게 당내의 일반적 시각이다. 즉 당내 주류세력의 ‘불공정한 압박’에 대한 항의였다는 것이다.
2000년 16대 총선 때도 여야 가릴 것 없이 공천심사위원회가 버젓이 있는데도 “누가 누구를 밀었다더라”는 식의 불공정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김창혁기자chang@donga.com
▼페어플레이 2002 ▼
- 사회 공정성 평균42.5점
- 이회창 35.4% 이인제 33.1%
- "월드컵 통해 공정한 경쟁 배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