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톈진(天津)의 삼성전자 지사장 사무실에는 이 지역 최고권력자인 중국공산당 톈진시 당서기와 수시로 연락할 수 있는 핫라인이 개설돼 있다.
“공장에 수돗물이 잘 안나온다”고 전화하면 공무원들이 즉각 출동해 고쳐놓는다. 각종 법령과 제도를 회사경영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정비해둔 터라 핫라인이 있어도 불만을 털어놓을 일은 별로 없다.
최근 삼성 이건희 회장의 중국방문을 수행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기업인에 대한 대접이 다르더라”면서 “이러니까 대기업 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앞다퉈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도와주지 않아도 좋다. 불필요한 규제만 없으면 된다. 미친 듯이 일할 수 있게 내버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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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손길승 회장은 작년 7월 전경련 세미나에서 “기업하려는 의욕을 꺾는 반(反)기업 정서가 사라지지 않는 한 투자가 살아나기는 힘들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손 회장은 SK의 중국본사 설립 일정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중국 투자를 늘리는 것이 규제 때문만은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묘한 여운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인접국의 기업경영 환경을 부러워하고, “국내에서는 사업하기 힘들다”는 푸념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상황. 대통령이 앞장서서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한국의 현주소다.
현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경제정책의 핵심테마로 설정했다. 장관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기업이 겪는 애로를 정책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4년간 5000여건의 규제가 없어지거나 개선됐다.
하지만 기업인들은 “기업하기가 갈수록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들도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경쟁국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 외국계 기업 대표는 “한국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있는 지리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다국적 기업의 아시아 본부가 드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고 충고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전경련 김석중 상무는 “정부가 기업인을 믿지 못하고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대기업을 향한 감시의 시선을 거두는 순간 방만경영 부당내부거래 외환밀반출 등 온갖 못된 짓을 할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규제의 그물을 촘촘히 쳐놓는다는 것.
물론 정부와 사회구성원들이 기업을 불신하게 된 데는 당사자인 기업의 책임도 크다. 일부기업은 정경유착을 통해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의 잘못 때문에 생산 고용 투자 수출 등을 통해 국부(國富)를 창출하는 주역인 기업이 도매금으로 매도돼서는 곤란하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한국경제의 대표선수인 기업의 손발을 묶어놓고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규제만이 기업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말 한마디를 하거나 직원의 채용규모를 정할 때도 관(官)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과 이런 저런 명목의 준조세 등이 기업을 피곤하게 한다.
정치권이 법인세 인하논쟁을 벌일 때 한 대기업 임원은 “준조세만 줄여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한국처럼 국토와 자원이 빈약한 북유럽의 강소국들이 어떻게 ‘부자나라’의 반열에 들었는지 살펴보면 몇 년째 지루한 ‘규제완화 공방’을 벌이는 한국의 경제주체들이 적지 않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핀란드는 정부가 경제정책을 결정할 때 대기업 경영진을 참석시켜 의견을 경청한다. 정부 정책이 기업 및 시장의 흐름과 동떨어지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조치다.
1980년대초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었던 네덜란드는 ‘바세나 협약’이라는 노사정 합의를 통해 안정적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은 경제의 활력을 유지시키는 핵심 요소다. 경기침체의 돌파구도 생산활동의 주역인 기업의 의욕을 살릴 때 만들어진다.
고려대 어윤대 교수는 “밉든 곱든 기업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조직”이라며 “경영의 본질과 상관없는 요구를 하면 기업은 독창성과 도전성을 잃게 되고 그 피해는 국가경제 전체가 짊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기업에 대한 간섭을 가급적 줄이고 기업은 시장질서를 충실히 지키는 나라.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남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박원재기자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