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에서 보신각 종소리를 듣는 한국인,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프랑스인,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부둥켜안고 2002년 첫날을 맞는 미국인. 새해의 품에 안기는 각국 국민의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심정은 비슷할 것이다. 저마다 올해는 미움 대신 사랑을, 아픔 대신 건강을, 가난 대신 풍요를 누리기를 기원했겠지.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테러와 전쟁으로 얼룩졌던 지난해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해에는 지구촌에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기를 간구했으리라.
▷유럽 12개국 국민은 ‘거대한 어깨동무’로 2002년을 시작했다. 새해 첫날 거리로 나선 이들의 호주머니에는 ‘유로’라는 이름의 똑같은 화폐가 들어 있다. 유럽연합(EU) 15개 회원국 가운데 영국 덴마크 스웨덴을 제외한 12개국의 국민 3억명이 똑같은 화폐를 사용하는 거대한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EEC) 설립을 위한 로마조약이 발효된 이후 줄기차게 진행돼온 유럽 통합의 절정이어서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3월1일이 되면 독일의 마르크, 프랑스의 프랑 등 각국의 부(富)를 상징하던 화폐는 역사 속으로 퇴장하고 유로만 남는다.
▷유로 통용에 대해서는 빛과 그림자가 엇갈린다. 환전할 필요가 없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환전상들은 밥줄이 끊기는 식이다. 환전 수수료와 환 리스크가 감소하면서 교역이 증가하고 경제 성장이 촉진될 것이라는 전망이 유럽인들을 고무시키고 있으나 막대한 화폐 전환비용과 물가 오름세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지난 해 막바지에는 금고로 개조된 리무진이 스위스로 몰려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각국의 ‘검은 돈’이 세탁을 위해 대거 밀반출되기도 했다.
▷유로지폐에는 창문과 다리 그림이 들어 있다. 단일 화폐가 유럽인의 마음을 열고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특정 국가의 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 실제로 존재하는 건축물 대신 오스트리아의 미술가가 도안한 그림을 채택했다. 국가와 민족이 다른데도 화폐 통합으로 힘차게 새해를 시작하는 유럽. 남북으로 나눠진 한민족이 쳐다보면서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대화의 문을 더욱 열어 가는 방법을 찾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방형남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