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파리 생활도 벌써 28년이나 되었다.
내 남편 백건우는 조금 여유가 생기면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마레’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떨 때는 세느강을 끼고 있는 카페에 앉아 파리지엥들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그들과 함께 숨쉬는 것을 즐긴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음악이 들릴까?
그는 연주자로 등장하면서부터 무엇보다도 프랑스 음악을 사랑해 왔다. 오랜 문화 역사와 함께 삶을 즐길 줄 아는, 여러 분야에서 예술적으로 뛰어난 감각을 가진 프랑스인을 그는 사랑하며 존중한다.
백건우의 말은 조용하다. 따스한 마음을 갖고 속삭이듯.
그의 말투와 성격에서는 이번 연주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가브리엘 포레의 음악과도 비슷한 점들을 찾을 수 있다. 포레는 늘 자기 음악세계에 대해 의문과 절망, 반복되는 노력, 그리고 작품 속에서의 최고의 순수함을 추구했다.
많은 예술가들은 밤에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아마도 밤의 깊은 침묵이 자연과의, 나아가서는 우주와의 거침없는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인 듯하다.
녹턴(야상곡)을 여러 곡 작곡한 쇼팽이나 포레 역시 밤의 외로움과 꿈을 동시에 그려내는 것이 아닐까.
백건우는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 ‘곡목끼리 서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1부의 쇼팽은 2부의 포레를, 포레는 또 쇼팽을 새롭게 들리게 할 것이다.
중간에 놓여있는 리스트는 두 작곡가를 노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내게는 우리 두 사람이 얼마 전 가진 베니스 여행의 기억 때문에도 리스트의 ‘베네치아와 나폴리’가 더욱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앙코르곡은 음악회의 마지막 이미지이기에 전체적인 프로그램의 인상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백건우는 포레의 ‘로망스’를 무척 사랑한다. 순수하면서 깊은 감명을 주는 이 곡이 한국의 많은 이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곡이 되기를 그는 깊이 바라고 있다.
그는 이 ‘로망스’를 마지막 앙코르곡으로 남기려 한다. 포레의 잔잔한 여음(餘音)을 오래도록 간직해달라는 당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