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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눈]정옥자/임오군란 떠올리는 임오년

입력 | 2002-01-06 18:17:00


임오년이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882년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요즘 한창 방영되고 있는 ‘명성황후’에서 임오군란은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으로만 묘사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임오군란의 원인은 외척 세도정치의 본질 및 외세에 대한 대응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조선은 문치주의를 지향하여 문화국가로서 정체성을 확고하게 다진 사회였다.

여기에 이질적인 문명인 서구 제국주의가 밀려오던 19세기 후반에 대원군은 섭정을 하며 양반에게도 세금을 물리는 호포법을 시행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는 유림의 근거지인 서원을 철폐하는 등 대대적인 내정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1866년 일어난 병인양요는 서구열강의 침략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이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서구열강과 그에 편승한 일본이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목적은 그들의 조악한 공산품과 우리의 생필품을 교역하려는 것이므로 섣불리 문을 열었다가는 우리 경제가 파탄에 이를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국민의 위기의식은 너무나 낯선 대상과 그에 의하여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대원군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 것도 이러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조선후기 사회는 약탈과 침략을 일삼고 평화를 저해하는 존재를 오랑캐로 규정하여 그러한 행위의 당사자인 군사대국 청나라에 대해 심복하지 않고 청을 쳐 복수설치(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