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캐릭터 열전'이 새해부터 매주 '심산의 영화속 사랑'으로 바뀝니다. '심산의 영화속 사랑'은 사랑을 주제로 영화를 다채롭게 읽어낼 것입니다》
장 자크 아노의 ‘불을 찾아서’(La Guerre du feu)는 참으로 독특한 영화다. 대사는 있지만 해독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자막이 필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캐릭터와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비록 기원전 8만년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간이라는 동물 본연의 희노애락이나 오욕칠정은 오늘날의 우리와 별 다를 바가 없어 그들의 표정이나 몸짓만 봐도 그 속마음을 넘겨짚을 수 있다.
광활한 대자연과 박진감넘치는 스펙터클은 현대 영화의 테크놀로지를 집대성했다는 ‘반지의 제왕’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우리는 인류 최초의 애인을 이 영화에서 만난다.
영화 초반부, 원시인들의 세계에서는 개별적인 사랑이 없다. 정사는 있지만 그것은 집단적인 교미에 불과하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암내에 문득 성욕을 느낀 수컷이 다짜고짜 뒤에서 덮치는 식이다. 암컷은 약간 성가셔하면서 짜증을 낼 뿐 교미 자체를 거부하진 않는다.
‘불을 찾아서’는 이 원시공동체적 혼음관계에서 개별적인 사랑이 분파되어 나오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불을 찾아서’는 부족을 대표해 불을 찾아 나선 사내들이 겪는 모험과 성취의 스토리다. 이 과정에서 ‘불을 찾는 사내’(캐릭터의 이름이 없으므로 이렇게 표현하는 수밖에 없다)는 ‘불을 지필 줄 아는 여인’을 만나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체험하면서 특별한 사랑에 빠져든다.
그 사랑은 왜 특별한가? 암컷 일반에 대한 성욕이 아니라 특정한 암컷에 대한 성욕이었기 때문이다. 보편적 교미가 아니라 특수한 정사다. 게다가 그 정사는 등 뒤에서 덮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면서 이루어진다. ‘불을 찾는 사내’는 혼란스런 기쁨에 빠져든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개별적인 사랑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진흙으로 얼굴을 치장한 서늘한 눈매의 여인. 특정한 수컷에 대한 설레임과 그리움, 그리고 걱정으로 낯빛을 흐리던 인류 최초의 애인. 우리가 그녀에게서 배운 것은 단지 정사의 새로운 체위만이 아니다.
그녀는 웃음의 미학을 깨우쳐줬고 불을 지피는 방법을 가르쳐줬으며 무엇보다도 ‘가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풍요로운 만월(滿月)만큼이나 둥글게 솟아오른 배를 다정히 보듬고 있는 두 남녀의 마지막 모습은 코 앞으로 닥친 가족의 탄생을 예고한다. 인류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훗날 엥겔스가 집필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잠시 잊어도 좋을 만큼 가슴이 따스해지는 장면이다.
심산·시나리오작가 besmart@nets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