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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흐르는 한자]署 經(서경)

입력 | 2002-01-08 18:28:00


署 經(서경)

署-서명할 서經-거칠 경奪-빼앗을 탈 諫-간할 간嚴-엄할 엄納-들일 납

一人至上(일인지상)의 專制君主(전제군주)시대에도 王權(왕권)을 제한하는 메커니즘이 있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史官(사관)의 존재다. 본디 중국에서 있었던 제도로 王의 左右(좌우)에 각기 史官을 두어 左史, 右史라 하였으며 右史記言(우사기언), 左史記事(좌사기사)라 하여 왕의 言行을 전담하여 기록하도록 했다.

그러나 말이 言行의 ‘記錄’이지 실은 王의 一擧手一投足(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史草(사초)로 남겼으므로 이건 숫제 왕의 행동을 監視(감시)하고 制約(제약)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史官의 直筆(직필)을 보장하기 위하여 史庫(사고)는 아무리 帝王이라 할지라도 열지 못하도록 제도화하였다.

하지만 못 하게 막으면 더 하고 싶은 게 人之常情(인지상정). 게다가 生死與奪(생사여탈)을 한 손에 쥐었던 帝王에 있어서랴. 英明君主(영명군주) 唐太宗(당태종)도 衝動(충동)을 참지 못하고 史庫를 열려다 忠臣 房玄齡(방현령)의 제지를 받고 물러섰다.

우리나라도 그런 예가 많다. 朝鮮 太祖 李成桂(이성계)는 史官 申槪(신개)의 諫言(간언)으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으며 天下賢君 世宗도 父王의 太宗實錄(태종실록)이 완성되자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가 右議政(우의정) 孟思誠(맹사성)의 제지를 받고 그 至嚴(지엄)하신 체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官吏의 任命에 있었던 署經이다. 왕이 관리를 임명할 때 반드시 臺諫(대간)의 ‘署名을 거치도록’ 했던 제도로 고려 때부터 있었다. 당시 受職者(수직자·지금의 被任命者)는 자신을 포함해 父系, 母系 도합 3代 4祖(父, 祖, 曾祖, 外祖)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署經單子(서경단자)를 臺諫에 제출해야 했는데 臺諫은 이를 근거로 당사자의 才行(재행)과 賢否(현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가부를 결정하였다.

따라서 아무리 임금이 관리의 임명을 裁可(재가)하여 告身(고신·지금의 임명장)을 내렸다 할지라도 여기에 臺諫이 署名하지 않으면 취임할 수 없었다. 물론 심사결과 하자가 있으면 ‘作不納’(작불납)이라 쓰고 서명하지 않았다. 이처럼 臺諫이 告身에 서명하는 것을 특별히 告身署經이라 하였다.

本 制度의 근본 취지는 첫째, 부당 졸속 인사를 방지함으로써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나아가 효율적인 국정운영을 돕기 위해서였고 둘째, 왕권을 규제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