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씨의 대하소설 < 토지 >가 3년만에 재출간되었다. 지식산업사 솔출판사 등을 전전했던 기구한 운명의 이 작품은 김씨의 또다른 대표작 < 김약국의 딸들 >로 인연을 맺었던 나남출판사에 새 둥지를 틀었다.
솔출판사 판본보다 5권이 늘어난 나남판 < 토지 >는 1부∼5부 전 21권이다. 한층 고급스러워진 옷으로 새로 갈아입은 이 책에는 무엇보다 김씨가 새로 써 넣은 서문이 눈길을 오래 붙잡아 둔다. 그간 이 작품을 절판인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한 이유 뿐만 아니라 문학과 작가의 위상과 < 토지 >를 쓴지 25년이 지나서야 왜 ‘지긋지긋한’ 이 작품을 썼는지 등에 대한 노 작가의 소회가 읽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세사(世事) 한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는 고백에는 가슴이 숙연해지기도 한다.
지난주말 새로 출간된 < 토지 > 머리에 실린 박씨의 서문을 싣는다.
「2002년版 < 토지 >를 내며」
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나는 《토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지겨웠고 부담스런 짐을 부리고 싶었다. 심지어 〈토지문화관〉에 관해서도 소설과는 무관하며 ‘토지공사’에서 지었으니 토지라, 신경질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또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어느 특정한 작가나 작품의 몫이 전혀 아니며 예술가, 학문하는 분들이 활용하는, 다만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그해, 그러니까 토지를 끝낸 1994년 8월 15일, 그때도 나는 해방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멍청히 앉아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에서, 폭풍이 몰고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토지》의 운명도 기구했다. 25년 동안 여러 지면(紙面)을 전전했고 4부까지 출간되었으나 3년 동안 출판정지, 절필한 일이 있었다. 완간이 된 뒤에도 출판계약이 끝나면서 3년간 책을 내지 않고 절판상태를 애써 외면했다. 작품이 나간 이상 독자에게는 읽을 권리가 있고 이미 작가 손에서 떠난 거라며, 꾸지람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의 추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인(商人)과 작가의 차이는 무엇이며 기술자와 작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차이가 없다면 결국 문학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의미를 상실한 문학, 맹목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삶,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책이 다시 나가게 되니 마음은 석연찮다. 자기연민이랄까, 자조적(自嘲的)이며 투항한 패잔병 같은 비애를 느낀다.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얼마 전에 하동 평사리에 최참판댁을 복원해놓고 〈토지문학제〉라는 행사가 있었다. 허리를 다쳐 운신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뒷전이 내 편안한 자리로 늘 치부했던, 숫기 없는 기질 탓도 있어 잔치에 참가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딸아이의 부축을 받으며 하동으로 내려갔다. 섬진강 강변 길을 따라가는데 지천으로 쌓아놓은 붉은 감이 오후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그때도 왜 나는 작가가 되었을까, 마음속으로 뇌었다.
해거름의 행사장에서 몸과 마음이 얼어버린 나는 자동인형처럼 연단으로 올라갔다. 지리산의 한(恨)에 대하여 겨우 입을 열었다. 오랜 옛적부터 지리산은 사람들의 한과 슬픔을 함께 해왔으며, 핍박받고 가난하고 쫓기는 사람, 각기 사연을 안고 숨어드는 생명들을 산은 넓은 품으로 싸안았고 동족상쟁으로 피 흐르던 곳, 하며 횡설수설하는데 별안간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 내 안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세월이 아우성치며 달겨드는 것 같았다. 뚝이 터져서 온갖 일들이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아아 이제야 알겠구나, 《토지》를 쓴 연유를 알겠구나 마음속으로 울부짖으며 나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지도 한장 들고 한번 찾아와 본 적이 없는 악양면 평사리, 이곳에 《토지》의 기둥을 세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연치고는 너무나 신기하여 과연 박아무개의 의도라 할 수 있겠는지, 아마도 그는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전신이 떨렸다. 30여년이 지난 뒤에 작품의 현장에서 나는 비로소 《토지》를 실감했다.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악양평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호수의 수면 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다. 그땅 서편인가? 골격이 굵은 지리산 한자락이 들어와 있었다.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理想鄕)이다. 두 곳이 맞물린 형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없는 무리.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이상향을 꿈꾸고 지향하며 가는 것 또한 우리네 삶의 갈망이다. 그리고 진실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토지》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향기뿐 아무것도 없다. 충격과 감동, 서러움은 뜬구름 같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같이 사라져버렸다. 다만 죄스러움이 가끔 마른 침 삼키듯 마음 바닥에 떨어지곤 한다. 필시 관광용이 될 최참판댁 때문인데 또 하나,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이나 아닐까. 지리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 의해 산은 신음하고 상처투성이다.
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2001. 12. 3
박 경 리
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