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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질서 新문명]②뉴욕주립대 명예교수 조지 G 이거스

입력 | 2002-01-11 18:18:00


【조지 G 이거스 미국 뉴욕주립대 명예교수(76)는 역사를 바라보는 학자들의 시각을 한 발 뒤에서 관조하는 세계적인 사학사(사학사)학자로 유명하다.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급변하는 세계 질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보았다.】

-세계질서의 변동이 진행되고 있는 21세기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20세기 역사의 중요한 흐름은 어떤 것이 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소련 붕괴 이래 지난 10년 동안 세계 질서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고 이와 함께 역사 인식도 변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20세기에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1945년 이후 형식적인 의미에서 식민주의시대는 끝이 났고, 이전의 식민 지배국가들 대부분이 1945∼1960년 사이에 피지배국들의 독립을 받아들였습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계속 장악하려 했고, 프랑스와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수치스런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침공도 마찬가지였지요. 인종차별 제도도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1990년대에 무너졌습니다. 백인우월주의는 이전의 식민지에서뿐 아니라, 1960년대부터는 서구 국가 내에서도 광범위하게 도전을 받았지요.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가치도 여성 운동의 부상과 함께 위협을 받았습니다.”

▼글 싣는 순서▼

- ①伊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

-이런 역사의 변화는 역사 인식과 역사 서술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습니까?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역사 서술에는 두 개의 매우 다른 흐름이 있습니다. 이 두 흐름은 공식 문서에만 매달리며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을 무시하는 국가 중심적 역사의 오래된 패러다임을 대치했습니다. 한편에서는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성과와 함께 컴퓨터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고도로 계량화된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가 일어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을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접근이 시도됐습니다. 사회과학적 역사는 비(非)개인적인 구조와 과정에 초점을 맞췄지만, 매일의 일상에 주목하는 이 새로운 역사는 생생한 인간들과 그들의 느낌들을 양적 측면보다는 질적 측면에서 잡아내고자 했습니다.”

-20세기말에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은 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하는 역사 서술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프랑스와 리오타르, 헤이든 화이트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1960년대에 이미, 계몽주의 이래로 역사 서술의 원천이 됐던 서구의 ‘거대 담론’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역사는 목적도 방향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에게는 진실한 과거란 없었고, 따라서 과학적 또는 학문적 객관성의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각각 짜맞춰지거나 혹은 더 낫게 이른바 ‘창안된’, 검증 가능성 없는 많은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역사와 문학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이거스 교수님께서는 미시사적 접근을 비판하고 거시사적 역사 서술 방법을 주장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미시사는 거시사에서 간과하기 쉬운 인간 일상의 삶을 드러내 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대담론의 퇴조와 함께 한국에서도 미시사적 접근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의 ‘거시사’는 ‘미시사’로 대치되곤 했습니다. 이런 새로운 접근들은 실제로 과거에는 하찮게 여겨져 왔던 삶의 많은 측면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미시사가들은 이런 일상의 삶들이 일어난 큰 맥락을 다루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20세기를 장식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처절한 잔혹 행위들을 충분히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일어난 9·11 테러와 그에 뒤이은 ‘테러와의 전쟁’ 역시 그런 맥락일 겁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세계질서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큰 영향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2001년 9월 11일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역사와 역사 서술의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수천 명 죽인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지만, 이는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이 겨냥한 것은 바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중심과 미국 군사력의 심장부였습니다. 역사가들이 생각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이 이런 공격을 유발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한 것은 작은 테러리스트 조직일 수 있겠지만, 이들의 반(反)서구적, 특히 반미(反美)적 증오 뒤에는 무슬림이라는 훨씬 넓은 여론층이 있고, 나아가 이런 생각은 전에 식민지배를 받았던 지역에 상당히 널리 퍼져있습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성공 스토리를 담은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와 소수자들의 경험적 삶에 주목하는 미시사는 모두 이 문제를 놓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분명히 자본주의의 힘에 의한 비서구사회의 식민지화를 탐구하는 거시사적 접근이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식민지화에 대한 것이라면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방식이 많이 사용돼 오지 않았습니까?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자본주의적 팽창의 역동성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착취를 탐구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부자와 가난한 자,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그러나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문화와 종교에 뿌리를 둔 비경제적 요소들을 충분히 설명해 내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사회과학적 분석들을 효과적으로 종합하는 데는 반드시 역사의 질적 측면을 고려하는 문화인류학적 개념과 방법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9·11테러는 이런 역사 인식 방법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현재 상황에서 비극적인 문제는 전쟁의 상대인 테러리스트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맹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현 정부와 그 동맹국들은 그들의 정책과 오만함으로 인해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삶이 거의 모든 측면에서 피해와 상처를 입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 서방의 적들은 ‘서구’도 ‘비서구’도 모두 획일적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서구세계에도 고삐풀린 전지구화의 위험을 아는 넓은 여론층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근대 서구의 유산 중에는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필수적 긍정적 요소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과거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전세계의 많은 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가난과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유산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메일인터뷰〓김형찬기자 khc@donga.com

▼美망명 유태계 독일인…反戰-민권운동 펼쳐▼

◇조지 G 이거스는 누구인가=미국 뉴욕주립대(버팔로) 명예교수인 조지 G 이거스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사학사(史學史)가이다.

192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소년기에 나치를 경험한 그는 나치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망명자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를 공공연히 지지했고, 베트남 참전을 반대하는 반전운동 및 민권운동에 적극 가담해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프랑스사에서 독일사로, 지성사에서 역사이론으로 확대되며 역사 연구와 역사 서술의 역사를 국제적 수준에서 조망할 수 있는 우리시대의 유일한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 역사학계에서 그의 중요성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미 모두 우리말로 번역된 ‘독일 역사주의’(박문각), ‘유럽 역사학의 신경향’(전예원), ‘20세기 사학사’(푸른역사)라는 그의 사학사 3부작이 나오지 않았다면, 사학사라는 분야는 역사학내에서 불필요한 분야로 고사 당했을지 모른다. 사학사란 하나의 역사서술이 나타나는 역사적 맥락, 즉 사회문화적 토대를 연구하는 분야로서 일종의 지성사다. 이거스 교수의 3부작은 바로 레오폴드 폰 랑케 이래 오늘날까지 역사학의 역사가 어떤 흐름으로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대작이다.

둘째, 역사학을 보는 그의 시야는 그야말로 전지구적이다. 독일 역사주의를 기점으로 해서 성립한 근대 역사학은 역사를 ‘국민국가의 역사’ 곧 국사(國史)로 축소하는 전통을 낳았다. 이런 역사의 ‘국사화’는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역사학을 발전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학을 정치의 시녀로 전락시킴으로써 역사학의 위기를 초래했다.

오늘날 역사학 위기의 근본원인은, 역사의 중요한 문제들은 전지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서 발생하는데 비해 전문 역사학자들은 그 문제에 대한 연구를 국사의 차원으로만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역사학의 위기에 직면해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역사학 분야는 역사학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진단하는 사학사다. 이같은 맥락에서 이거스 교수는 사학사적 관점에서 9·11 테러 이후 앞으로의 역사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한다.

1960년대이래 서구 지성계의 가장 큰 흐름은 진보를 위한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나타난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이 미시사이다. 이거스 교수는 역사학의 이런 미시사적 경향이 대두하는 배경과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지만, 그것이 역사학의 지배담론이 되는 데는 명백히 반대한다. 그는 9·11 테러가 일어난 역사의 거대한 맥락이 미시사적 역사 연구를 통해 해명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9·11 테러의 근본 원인은 분명 미국 패권주의 혹은 서구 자본주의와 같은 역사의 거대한 구조다. 그러나 어떻게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인물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미시사적 연구를 통해서는 이런 역사의 거대한 구조가 해명될 수 없는 것일까?

이거스 교수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학사적인 메시지는 ‘거시사 대 미시사’라는 이원론적 구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둘 사이의 새로운 접합을 통해 ‘서구’와 ‘비서구’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해방과 자유의 역사라는 세계사의 보편적 과정 속에서 한국사의 특수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기봉(경기대 교수·서양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