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당 음주량 세계 2위. 한국인의 술 성적표다. 1등을 차지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김없이 섞어먹는 주당들이다. 흔히 폭탄주를 떠올리지만 맥주 소주 양주 막걸리 등 섞는 재료에 따라 조합도 여러 가지다. 여기에다 사이다 콜라 등 음료수도 섞어먹는 술의 양념으로 한 몫한다. 섞어먹는 술이 새삼스럽지 않다. 전통의 폭탄주에서 최근 유행하는 50세주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조합들이 유행하면서 섞은 술은 한국 술 문화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섞으면 맛있고 재미있다?〓중견건설업체인 동문건설 경재용회장은 등산광이다. 연간 70여 회 산에 오른다. 등산을 마치고 산 입구에 다다르면 으레 한 잔이 생각난다. 그냥 소주나 맥주, 막걸리를 한 종류만 마시지는 않는다. 그에게 등산 후에는 ‘소맥’이나 ‘막맥’이 제격이다.
소주와 맥주를 섞으면 소주 특유의 독하고 쓴맛이 맥주의 시원함으로 덮인다. 텁텁한 막걸리도 맥주와 섞이면 시원한 술로 변한다. 경 회장은 “해롭다고 생각하면 술을 먹지 말아야죠. 그냥 맛있게 만들어 마시는 것은 개인적인 기호일 뿐”이라고 말한다.
두산 홍보실 신동규 차장은 “소주와 전통주가 만나면 부드러움이 생긴다”고 말한다. 술자리에 여직원이 끼면 산상군주(山上君酒)가 등장한다. 산소주 위에 전통주인 군주를 거꾸로 세워 섞이게 만든 술이다. 삼투압 현상에 따라 10분 남짓이면 훌륭한 명주가 만들어진다는 설명이다. 전통주의 달큰한 맛이 소주의 쓴 맛을 없애준다. 요즘 유행하는 50세주(백세주와 소주를 섞은 술)도 마찬가지다.
섞으면서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아이북랜드 김상훈(34)씨가 고등학교 시절 처음 배운 술은 소주와 써니텐을 섞은 ‘소텐’. 요즘도 소주에 음료수를 타서 마시면서 추억을 함께 마신다. 섞는 재미 속에 추억이 있다는 김씨가 가장 즐기는 술은 일명 ‘막사’다.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은 술로 대학 시절 서울 잠실의 석촌호수변 포장마차에서 어지간히 마셨다. 김씨는 “한두 사발 마시기는 막사만한 술이 없다”고 말한다.
폭탄주는 설명이 필요 없는 술이다. 정통 폭탄주에 회오리주, 빨대주, 빈 라덴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제조법이 나온다. 한국인만 유별나게 폭탄주를 마시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보일러 메이커(Boiler Maker)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주인공 형제가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터키 등 유럽인들은 맥주에다 위스키 대신 보드카를 넣어서 먹기도 한다. 한국 폭탄주의 특징이라면 술의 내용이 아니라 마시는 속도와 양인 셈이다.
▽속도와 양이 관건〓10분 동안 폭탄주 5잔을 마시는 것과 같은 시간 동안 맥주 5잔과 양주 5잔을 마시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서울대 가정의학과 유태우 교수는 “이런 경우 그 자체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라며 “술이 주는 충격은 섭취하는 알코올의 양과 마시는 시간이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단숨에 한 잔을 비워버리는 ‘빨리, 많이’가 치명적이지, 섞는 자체가 그 술들을 따로따로 마시는 것보다 더 나쁘지는 않다는 설명. 맥주에 사이다를 섞으면 맥주만 마시는 것보다 알코올이 적어 오히려 좋다고 설명하는 의사도 적지 않다. 다만 섞지 않고 한 종류의 술만 마시는 것보다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맥주와 막걸리, 소주와 백세주 등도 같은 원리로 설명된다. 부드럽고 먹기 쉬워 많이 마시게 돼 해롭지 두 세 잔만 마신다면 해로울 것이 없다는 얘기다. 다만 폭탄주나 다른 섞어 만든 술을 한두 잔만 마시고 술자리를 끝내는 사람은 드물다는게 문제.
섞은 술을 즐겨마실 정도의 주당이면 알코올 중독자가 많지 않을까. 뜻밖에 알코올 중독자 중에는 폭탄주 애호가는 드물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김동학씨는 “알코올 중독자 중 술을 섞어 먹는 사례는 거의 없다. 다만 폭탄주 애호가들은 서서히 망가지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