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탁환씨가 대중문화 흐름의 저변을 짚어내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대중문화는 이제 단순한 문화 현상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의 흐름을 읽어내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코드가 되고 있습니다. 김씨는 방송 영화 가요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독특한 글쓰기를 선보일 것입니다. TV프로그램이나 영화에 대한 비평에서부터 스타들의 인물 분석, 대중문화의 최신 트렌드까지 다양하고 신선한 접근 방식으로 독자들을 찾아 뵙겠습니다. 》
오늘도 그대의 놀란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SBS 드라마 ‘여인천하’가 끝났네요. 16세기 조선의 고뇌를 홀로 떠안은 사람처럼, 그대는 70분 내내 충분히 고통스럽고 충분히 당당합니다.
500년 가까이 야사와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환생을 거듭한 우리지만, 서찰을 띄우기는 처음이군요. 황진이와 정난정이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답니다. 나는 그대의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불덩어리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잘 만질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대와 같은 흉터를 지녔으니까요.
서녀(庶女)란 무엇입니까. 첩의 자식. 죽는 날까지 숨죽이며 응달에서 응달로 숨어 다녀야만 하는 존재.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아비의 이름을 욕되게 만드는 씨앗. 양반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더라면, 들꽃처럼 개펄처럼 살다 갔겠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개만도 못한 인간, 그게 바로 서녀의 운명이지요.
차별을 의식하기 시작한 예닐곱 살부터 악착같이 시문을 외우고 거문고를 익혔어요. 서출이라 업신여기는 사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지만 위안 대신 더 큰 공허가 밀물지어 왔지요. 사소한 승리가 쌓일수록 말하는 꽃의 이름값만 올라갔으니까요. 평범한 사랑과 행복으로는 이 거대한 비웃음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밤이 그대에게도 있었을 겁니다.
내가 팔도를 주유하며 광폭한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질 때, 그대는 그대를 옭아맨 힘의 근원으로 다가갔지요. 그때 우리는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극한을 넘어서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던 시절이었죠. 여자 그것도 서녀가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씩 해냈습니다. 명창 이사종과 계약결혼을 하고 양곡 소세양 선생을 비롯한 당대의 문사들과 시로 사귀는 송도 기생의 소문을 당신도 들으셨겠죠. 나 역시 윤아무개의 첩실이 구중궁궐을 자유롭게 오가며 조정 공론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답니다.
낭떠러지의 끝에서 우리는 갈라졌지요. 나는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한 발 뒤로 물러섰고 그대는 그대의 능력을 믿으며 한 발 더 나갔습니다. 내가 꽃계곡의 화담 서경덕 선생 문하에서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와 인간다움의 가치를 배울 때, 그대는 그대를 정부인으로 인정한 권력과 한 몸이 되었지요.
우리가 나서 죽은 16세기는 암흑 그 자체였답니다. 정암 조광조 선생의 호연지기가 꺾인 후로는 치욕과 슬픔의 나날이었죠. 화담 서경덕 선생도 남명 조식 선생도 끝내 혼탁한 세상에 나아오지 않고 고향에 머무르는 것으로 왕실과 조정에 대한 비판을 대신했지요. 용상의 주인이 세 번 더 바뀌고 선조대왕이 즉위한 후에야 사림의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의 위력이 대단한 걸까요, 역사드라마라는 장르가 기기묘묘한 탓일까요. 21세기에 환생한 그대는 지난 시절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문정왕후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음을 애써 외면할 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를 허락한 이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이 잘못이냐며 목소리를 높이네요.
선악의 기준도 없고 호오의 구별도 불필요한 그대의 충심은 주인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노예의 들뜬 열망에 불과하지요. 그대의 얼굴이 브라운관을 꽉 채우고 그대의 칼날 같은 웃음이 풍광을 흔들수록, 나는 슬퍼집니다. 그대가 주도한 여인들의 천하는 ‘권력에 눈 먼’ 여인들의 천하일 따름이지요. 그따위 천하에 갇히느니 길 위에서 홀로 굶어죽고자 했던 산림처사들의 깊고 먼 눈동자와 투명한 비애는 언제쯤 후손들의 가슴에 닿게 될런지. 서녀로 태어났다고 누구나 그대처럼 권력의 개 노릇을 자청하지는 않으며, 드라마 내내 두 눈에 힘을 한껏 넣은 채 뭇사내들을 부린다고 권력의 개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여성영웅이 될 수는 없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 밤 9시50분에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는 시청자들이, 출세지상주의자 정난정 그대에게 배울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을 하루 빨리 깨닫기를 바라며, 짧은 글을 마칩니다. 답장 기다릴께요.
소설가·건양대 교수 tagtag@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