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기억하시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열아홉 살에는 망설임보다 자신감이 컸지요. 낡은 턴테이블에 ‘들국화’의 공연실황앨범을 올려놓고 목청껏 ‘행진’을 따라 불렀습니다. 어두운 과거도 없고 힘든 시절도 적었지만, 내가 보낸 19년을 사랑한다는 고백과 아울러, 설령 미래가 밝지 않더라도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다졌지요.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고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린 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나만의 시절을 꿈꾸었습니다.
20대, 청춘의 길은 상상만큼 눈부시지 않았습니다. 육신과 영혼은 최루탄 연기와 깨진 보도 블록 사이에서 생채기 투성이였지요. 따르기만 하면 도달할 수 있는 진리의 길도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승리의 길도 없었답니다. 믿고 의지할 존재는 곁에서 헤매고 있는 친구들뿐이었어요. 일그러진 표정과 힘겨운 자세를 훔쳐보며 어깨를 걸고 노래를 불렀지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학을 졸업하고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80년대에 태어난 이들이 대학생이 되었고, 내 자식들도 ‘꼬마 생쥐 메이지’를 지나 ‘해리 포터’를 읽을 만큼 자랐지요. 아직까지 스무 살의 열정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벗으로부터 가끔씩 엽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 아침이면 열 살 혹은 스무 살 어린 후배들에게 감히 말을 건네고 싶어집니다. 때로는 눈짓으로 때로는 노래로.
타인을 비판하며 자신의 올바름만을 강조하는 가수들의 랩과 달리, ‘god’의 ‘길’은 ‘나’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찔러댑니다. 이 노래의 묘미는 세 번씩이나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없지만’ 혹은 ‘싶지만’에서 묻어나지요. 길을 걷는 이라면 누구나 알고픈 바람들이 랩의 도입부를 차지합니다.
세 번의 주저함에 이어 스스로 내린 답은 자신이 없더라도 이 길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결론과 결단을 유보한 채 흔들리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행진’의 낙관적 의지와도 다르고, 80년대 민중가요가 지닌 도덕적 정당성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길’의 방황은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을 담고 있지요. 부끄럽지 않은 명분을 만들고 동료의 숨소리에 기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이 길이 부여한 꿈은 누굴 위한 꿈이고 그 꿈이 이루어지면 나는 행복할 것인가. 자문자답의 밤은 깊어만 갑니다.
아홉 살, 그 길의 나뉨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시인 황지우는 ‘눈보라’에서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고 했지요. 후회의 골이 깊더라도 앞을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체념이나 절망은 버리세요. 작은 고개만 넘어도 주변 풍광이 변하듯 깊게 앓은 후에는 같은 사물도 다르게 보이는 법이니까요. 지루했던 일상을 찰나의 축제로 바꿀 수는 없지만, 때늦은 후회와 자책으로 남은 여행을 망칠 수는 없습니다.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요. 노래가 끝난 뒤에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아직은 꿈을 버리지 않고 속으로 울면서 걷고 있음을, 순간순간 주저하며 ‘없지만’과 ‘싶지만’을 되뇌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살고 있음을, 나 자신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겠지요.
‘길’의 고백은 소박하고 평범한 만큼 정직하고 힘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세대를 초월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그 물음의 보편성 때문이겠죠. ‘god’의 ‘길’ 위로 들국화의 ‘행진’이 겹칠 수는 없을까요. ‘들국화’의 팬도 ‘god’의 팬도 아득한 길 위에서 떠들며 노래하기는 마찬가지니까요.
소설가·건양대 교수tagtag@freechal.com
△god는…
박준형 윤계상 데니안 손호영 김태우로 구성된 남성 5인조 그룹. 1999년 ‘어머님께’로 데뷔해 같은 해 2집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을 내놓았다. 2000년 3집 ‘거짓말’이 190만장 판매되면서 일약 정상의 인기그룹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내놓은 4집 ‘길’은 143만장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