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보다 더 바그너적으로 보이는 안젤름 키퍼의 설치작업 ‘탄호이저’. 잿빛 책 더미와 고통의 상징인 가시나무로 엉켜 쌓여진 이 제단 앞에선 숨을 한 번 크게 쉬게 된다. 모든 존재 자체가 소멸하여 무화되는 제의식(祭儀式), 그 비의에서 덧없음이 느껴진다.
독일이 금기시하는 나치의 역사를 유일하게 다루는 작가의 이 작업이 왜 ‘탄호이저’인가. 키퍼는 바그너적인 구원을 반(反)바그너적으로 차용한 것인가. ‘바그너는 구원과 허무에 대해 똑같이 깊이 생각했다(니체)’는 것에 착안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역사 의식, 신화, 신비주의 카발라, 코스모스의 원리 등 우주의 상징체계로 현대성을 발휘하는 세계적인 작가다.
매력적인 것은 회화, 조각, 사진, 설치작업 등 다채로운 매체와 자연재료(돌, 짚, 나무, 모래, 해바라기씨 등)로 주제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거대한 화폭에 흩뿌려진 민들레 씨앗처럼 그것들은 영혼의 순례의 도정에서 마침내 월계수로, 생명의 꽃으로, 하늘과 대지를 연결하는 나무로, 천계의 성좌로, 영적 존재의 이미지로 제각기 발화하여 회생된다.
20년 간의 스케치들을 묶은 대형 책 뭉치를 소각하여 쌓아놓은 ‘20년간의 고독’, 한국의 들판을 연상시키는 들판 밭고랑 여기저기에 꽂혀 있는 나뭇가지와 거기 걸린 영성스러운 옷들을 보여주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대풍자의 아이콘으로서 마오쩌둥의 패널과 그 주변으로 현기증이 날만큼 현란한 양귀비꽃이 펼쳐진 ‘백화제방(百花齊放), 기호의 언어로 이름 지은 별자리 작품 ‘고래 자리’ …. 이 찬연한 변주곡들을 주도하는 그의 철학적, 문학적 사유들은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자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자 노력하는 키퍼의 작품에서 ‘낯섦’과 ‘낯설지 않음’은 하나의 동의어다. 이러한 작가의 기획 전시를 한국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여간한 행운이 아니다. 더구나, 작품을 돋보이게 한 훌륭한 전시공간에서 말이다. 현대문학 주간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