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자라 어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나의 청동시대’라는 시인 고은의 책제목이 말하듯 성장기는 한 인간의 청동시대이다.
성장은 이 청동시대의 반납을 요구한다. “소년은 죽었다”로 끝나는 괴테의 시 ‘마왕’(魔王)에서처럼, 성장은 소년의 반납 혹은 소년의 상징적 죽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이 반납의 절차를 통해 소년은 마치 누에고치에서 나비 나오듯 한 사람의 어른이 되어 걸어나온다.
이 반납, 우화(羽化), 변신의 과정이 무사할 리 없다. 인간은 아무도 ‘무사히’ 자라지 않는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미당(未堂)의 시는 노래한다. 무사하게 자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성장기의 바람 속에는 그를 떨게 한 내밀한 두려움과 불안, 그를 슬프게 한 외로움과 좌절, 어른들이 모르는 모험과 음모와 사랑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한 인간을 키운 비밀스런 바람의 이야기가 자서전 아닌 소설로 씌어질 때 ‘성장소설’(Bildungsroman)이 탄생한다. 성장소설은 그 주인공 화자가 아무리 객관화되어 있어도 그 인물을 구성하는 질료의 절반 이상은 작가 자신의 어린 분신-그가 반납해야 했던 ‘소년’ 남녀이다. 그는 어떻게 컸는가? 그를 두렵게 하고 떨게 한 것은 무엇인가? 주인공은 때로 허방 짚어 옆길로 빠지기도 하고 진창에 처박히기도 한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 나오는 오스카르처럼 그는 성장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한 인간이 된다. 그를 안내하고 지탱한 힘의 비밀은 무엇일까?
우리 중고등학교 학생들, 특히 고교생들의 독서 대상에는 반드시 양질의 성장소설들이 ‘필독서’로 포함되어야 한다. 성장소설의 효시가 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후 구미 국가들은 이 소설 형식이 인간 형성에 기여하는 놀라운 힘을 교육 자원으로 열심히 활용해오고 있다. 미국의 경우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 ‘별도의 평화’(존 노울즈), ‘호밀밭의 파수꾼’(J D 샐린저) 같은 현대적 성장소설들은 수십 년 동안 고교생 필독서 목록에 올라 있다.
우리에게도 박완서의 자전적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정채봉의 ‘초승달과 밤배’, 오정희의 ‘유년의 뜰’ 같은 좋은 성장소설들이 없지 않다. 신경숙의 ‘외딴방’이나 은희경의 ‘새의 선물’,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같은 작품들도 성장소설적 요소들을 갖고 있다.
작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도 읽히지 않는 것이 우리의 문제지만, 그러나 우리 문학에 양질의 성장소설이 빈곤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동화책 읽다가 갑자기 어른 소설로 건너뛰어야 하는 것이 우리 청소년들의 소년시대이다.
청소년 문학은 지금 거의 황무지로 방치돼 있다. 성장소설은 그냥 향수 어린 회고담이 아니기 때문에 어른 독자에게도 혼을 건드리는 읽을거리이다.
소년기의 꿈과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현실 사이에는 갈등과 괴리가 있고, 이 괴리로부터 창조적 긴장이 솟아난다. 모든 값진 창조는 이런 창조적 긴장의 산물 아닌가.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