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날 기다려봐라. 그래 가지고 너구리가 잡히겠나. 가∼들이 얼마나 영리한 놈들이라고….”
그랬다. 그 녀석들은 정말 영리했다.
도시 속 야생동물인 너구리의 이동경로를 탐사해보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양재천에 포획틀을 설치한 지 3주쯤 됐던가. 너구리는 고사하고 도둑고양이만 내리잡고 있을 때 고향(부산)에 계신 어머니는 수화기 저편에서 한심하고도 안됐다는 듯 혀를 끌끌차고 계셨다.
처음 이 코너를 시작할 때는 이렇게까지 길고 힘든 싸움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전조사도 충분했고 지리산에서 다년간 경험을 쌓은 동물연구가에다 포획전문가까지 참여한 상태라 4km 남짓한 양재천, 까짓거 이 잡듯 뒤지면 3∼4주 안에 결말이 나리라고 생각했다.
출발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모 방송사의 전문 다큐팀이 6개월 이상을 기다려서야 촬영했다는 양재천 너구리가 촬영 첫날 새벽 3시쯤 ‘떠∼억’하고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포획에는 실패했지만 다음 아이템이 준비되지 않았던 우리에겐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날 이후 너구리가 아예 자취를 감춘 것이다. 원인은 40여명에 달하는 스태프였다. 단기간에 촬영해 매주 방송을 내보내야 하므로 카메라도 5대 이상 동원돼고 전문 다큐팀보다 인력이 5∼6배 이상 필요했다. 인적이 끊긴 새벽 양재천을 활개치던 너구리들에게 40여명의 인원은 분명 이상기류였을 것이다.
대책은 철저한 위장! 촬영텐트를 멀찌감치 옮기고 스태프 전원은 동물의 배설물로 ‘X칠’을 했다. 영하의 날씨에 잠복을 계속한지 또 2주, 다행히 너구리는 돌아와 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포획틀 주위를 맴돌뿐 도무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철제틀에 거부감이 있나해서 나무틀로 바꿔보고 투명한 아크릴로도 만들어봤지만 허사였다. 날씨는 추워지고 스태프 사이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예 덫을 놓자, 마취총을 쏴서 잡자, 달려들어서 그물로 잡자….
실제로 먹이에 유인된 너구리가 코 앞까지 접근한 적도 있었다. 너구리는 날쌘 동물이 아니라 충분히 덮쳐서 잡을 수도 있었지만 혐오스런(?) 장면을 방송에 내보낼 수는 없다는 판단 아래 포획틀로 들어가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너구리는 끝끝내 우리를 배신했고 눈 앞에서 유유히 사라져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강원도 화천에서 너구리에게 물린 사람이 광견병으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제는 단순히 너구리의 이동경로 파악이 문제가 아니라 도시속 너구리의 광견병 감영여부를 판명해야하는 과제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좀더 적극적인 포획방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양재천에 대형그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물론 너구리에게 신체적 해는 전혀 없다.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빨리 잡아야한다는 생각에 내린 특단의 조치다. 이렇게 너구리와의 숨바꼭질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최원석(MBC ‘!느낌표’-다큐멘터리 이경규 보고서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