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지금은 폐간된 ‘미스터 블루’에서 윤태호(사진)의 작품 ‘혼자 자는 남편’을 보았을 때 얽매이지 않는 그의 상상력과 마주한 뒤, 난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고전 ‘흥부전’과 ‘별주부전’을 윤태호식 상상력으로 각색한 ‘연씨별곡’ ‘수중별곡’은 원전 못지 않은 풍자와 해학의 텍스트였다. ‘의도된 B급 만화’인 ‘수상한 아이들’은 한국 잡지 연재 사상 가장 불온하고 발칙한 상상력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사인펜으로 한 번에 그려나간 이 만화는 기획과 마케팅이라는 최소한의 상업적 요구를 묵살하는 ‘한국식 잡지시스템’에 대한 조롱이기도 했다. ‘열풍학원’이라는 텍스트도 권위를 조롱하고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 작품과 다른 특성을 지닌 작품이 1998년부터 ‘부킹’에 연재 중인 ‘야후’다. ‘야후’는 과거 시점에서 시작된 SF다. 88서울올림픽,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같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수경대 창설같은 허구적 사실을 조합해 서사가 진행된다. 커다란 삶의 상처를 안고 격변의 80년대를 살아가는 청춘 김현, 신무학의 이야기다. 허구이면서도 사실적인 텍스트는 스승 허영만이 보여준 서사의 매력과 닮아있다.
2001년 윤태호는 ‘야후’와 함께 스포츠 신문에 ‘로망스’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조연으로도 쉽게 등장하지 않는 노인을 내세운 일상만화인 ‘로망스’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긍정과 가슴에 와 닿는 긴 여운까지도 함께 선사한다. 2002년에는 여기에 한 작품이 더 추가된다. 새로 창간되는 ‘웁스’에 연재하는 ‘발칙한 인생’이 그것이다. ‘발칙한 인생’은 윤태호가 데뷔한 ‘미스터 블루’에 연재하다 잡지의 폐간으로 도중하차한 만화다. 윤태호는 “10여년이 넘게 준비를 했던 작품이라 아까워 다시 꺼내들었다. 3류 인생들이 변변한 직업도 없고 피해의식에 쌓인 채 살아가다 어느날 야구를 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들은 야구를 통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고 밝혔다. 평범하고 구질구질한 인생들의 넉넉한 풍요로움이 작품의 포인트다.
윤태호는 만화를 창작하는데 있어 “시작도, 끝도 작가의 몫이다.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작가”라며 “일이 늘어난 만큼 작품이 허술해지지 않고 꼼꼼하게 잘하겠다”고 2002년의 다짐을 밝혔다. 새롭게 시작된 그의 작품을 기대해 보자.
박인하·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